본관은 전의(全義). 자는 과지(顆之). 이순백(李淳伯)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양(李亮)이다. 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 이창신(李昌臣)이며, 어머니는 덕천군(德泉君) 이후(李厚)의 딸이다.
1491년(성종 22)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홍문관저작을 거쳐 부교리·지제교(知製敎) 겸 경연시독관(經筵侍讀官)·교리를 지냈다. 1495년(연산군 1) 부수찬이 되었으며, 이듬해에 수찬으로 승진되었다.
당시 기주관(記注官)으로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503년 홍문관부제학이 되었고, 이듬해에 호조참의로 옮겼다가 곧 예조참의를 거쳐 대사성이 되었으나, 앞서 홍문관에 있을 때 연산군의 후원관사(後苑觀射)를 논한 것이 화가 되어, 이 해 갑자사화 때 전라도로 귀양갔다.
1506년(중종 1) 유배지에서 유빈(柳濱)·김준손(金駿孫) 등과 같이 거병하여 진성대군(晉城大君)을 추대하려고 모의하였으나, 이미 중종반정이 성공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중지하였다.
이 해에 유배에서 풀려나와 주문사(奏聞使)의 이문(吏文)을 제술(製述)하였으며, 1507년 정국원종공신(靖國原從功臣)으로 전산군(全山君)에 봉하여졌다.
그러나 관작이 높지 않음에 불만을 품고, 중종이 선릉(宣陵)에 친제(親祭)하러 가는 틈을 타서 이찬(李纘)·윤구수(尹龜壽)·김잠(金岑) 등과 모의하여 견성군 이돈(甄城君 李惇)을 추대한 뒤, 박원종(朴元宗)·유순정(柳順汀) 등을 제거하려 하였으나 서얼 노영손(盧永孫)의 밀고로 발각되어 처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