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령진(會寧鎭)의 서쪽에 있던 울량합(兀良哈)의 추장 아비차(阿比車)가 아버지 낭패아한(浪孛兒罕)의 일족이 조선에 의해 살해당하자 이를 복수하려고 조선에 침입하였다. 이에 조선이 정벌에 나선 것이다.
1405년(태종 5) 울량합의 만호(萬戶)인 파아손(把兒遜) 등이 명나라의 유화 정책에 응하여 입조하자 명나라는 이곳에 모련위를 설치하였다. 이 모련위는 경원(慶源)의 북쪽인 두만강가의 두문(豆門)과 종성(鐘城) 북쪽인 벌시온(伐時溫)에 설치된 위(衛)이다.
그 당시 이들의 본거지는 목릉하(穆陵河)일대에 있었으며, 두만강 밖으로 이주한 동족과 함께 파아손에 의하여 통치되고 있었다. 그 뒤 모련위는 건주위(建州衛)의 거주자와 두만강 밖의 거주자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1410년 2월 울량합이 조선을 침입하자 조선은 길주찰리사(吉州察理使) 조연(趙涓) 등에게 명령을 내려 이들을 정벌하게 하였다. 이리하여 울량합의 본거지는 유린되어 모련위의 추장은 대부분 망하고 말았다.
명나라가 몽고를 정벌할 때 살아남은 추장들이 명군을 따라 정벌에 나서 공을 세우자 1411년 9월 모련위는 다시 설치되었다. 이 때 이들의 일부가 북으로 옮겨 휘발하상(輝發河上)의 건주위 부근에 겨우 명맥을 유지하였다.
한편, 북으로 옮겨 생활하는 모련위의 주력 세력과는 달리 모련위의 유부(遺部)는 여전히 두만강 가에 잔존하고 있었다. 경진년(1460)에 조선의 모련위 정벌은 잔존하는 유부에 대한 완전한 정복이었다.
당시 좌의정 신숙주를 함길도도체찰사로 하고 부체찰사 홍윤성(洪允成), 강원도관찰사 김계손(金繼孫), 함길도관찰사 정식(鄭軾), 한성부윤 김사우(金師禹), 첨지중추원사 강효문(康孝文), 예조참판 이극배(李克培) 등을 선위사(宣慰使)로 했으며 허형손(許亨孫)에게 기병과 보병 4,000명을 인솔하게 하였다.
또한, 함길도도절제사 양정(楊汀)은 보병과 기병을 2,500명으로 하여 이조참판 곽연성(郭延城), 회령진절제사 임득정(林得禎) 등을 인솔하게 하였다. 영북진절제사 강순(康純)은 보병과 기병 900명을, 길주목사 오익창(吳益昌)은 보병과 기병 800명을 인솔했는데 군대의 숫자가 총 8,000을 넘었다.
조선의 정벌대는 1차로 8월 27일 종성을 출발하여 같은 달 30일 다시 종성에 돌아왔는데, 이 정벌은 실패하고 말았다. 신숙주는 패전을 세조에게 알리고 제2차 정벌을 하명받았다. 제2차정벌에 나선 조선군은 대대적인 전과를 올렸다.
즉, 회령에서 추장 90여 명을 죽이고, 일반인 430여 명을 포획하거나 죽였으며, 900여 채의 집을 불태웠다. 그 결과 울량합족이 조선에 복종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정벌에도 불구하고 침입이 간간이 있게 되자 조선에서는 재정벌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추장들이 관할하의 사람들을 이끌고 투항한 것을 비롯, 붙잡아간 조선의 포로와 가축을 송환해오므로 이들에 대한 북정계획은 실행하지 않았다.
조선은 경진북정을 계기로 삼수·갑산의 방비를 강화하였다. 또한 조선 영토로 인정해오지 않았던 무산군(茂山郡)지방을 조선의 영토로 확신하게 되었다. 즉, 북정 이듬해 갑산군을 도호부로 승격하여 진을 두었고, 만호가 두어졌던 삼수에 군을 다시 설치하였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신숙주의 건의에 따라 무산지방에 점차 이민을 시킬 정책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건주위(建州衛) 여진정벌 이전에 일어난 사건으로 조선이나 명나라가 안정기에 들어선 이후 소수민족의 한 동향을 살필 수 있다. →건주여진정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