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제갑 ()

원주 김제갑 충렬비 정측면
원주 김제갑 충렬비 정측면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전기에, 정언, 층청도관찰사, 우승지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순초(順初)
의재(毅齋)
시호
문숙(文肅)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525년(중종 20)
사망 연도
1592년(선조 25)
본관
안동(安東)
주요 관직
우승지
관련 사건
임진왜란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조선 전기에, 정언, 층청도관찰사, 우승지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순초(順初), 호는 의재(毅齋). 고려의 명장 김방경(金方慶)의 후손이며, 할아버지는 김언묵(金彦默)이고, 아버지는 진사 김석(金錫)이며, 어머니는 기형(奇逈)의 딸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553년(명종 8)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 홍문관의 정자(正字), 병조좌랑, 정언(正言)을 거쳐 1581년(선조 14) 충청도관찰사를 역임하고, 1583년 우승지로 있으면서 도승지 박근원(朴謹元) 등과 함께 이이(李珥)·박순(朴淳)을 탄핵하다가 벼슬에서 물러났다.

1588년 평안도 지역 국경방어강화책의 일환으로 특별히 창성부사로 임명되었지만, 70세에 가까운 늙은 문관을 보내는 것이 불가하다는 병조판서 정언신(鄭彦信)의 반대로 해임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원주목사로 있었는데, 왜장 모리[森吉成]가 거느린 왜군이 관동지방을 휩쓴 뒤에 원주를 침공하여오자 가족과 주민을 이끌고 경내의 요새인 영원산성(鴒原山城)으로 들어가 방어에 임하였다.

그러나 요새만을 믿고 따로 대비책을 세우지 않았다가, 산성의 허점을 틈탄 왜군의 공격으로 결국 성이 함락되자 부인 이씨, 아들 김시백(金時伯)과 함께 순절하였다. 조정에서 그 충절을 기려 1592년 이조판서 겸 경연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의금부 성균관 춘추관사를 추증하였다.

원주의 충렬사, 괴산의 화암서원(華巖書院)에 제향되었다. 1966년에 강원도 애국유족부활위원회에 의하여 원주역 광장에 충렬비가 세워졌다. 1711년(숙종 37) 문숙(文肅)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참고문헌

『명종실록(明宗實錄)』
『선조실록(宣祖實錄)』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효종실록(孝宗實錄)』
『숙종실록(肅宗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한국금석문총람(朝鮮金石總覽)』
관련 미디어 (2)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