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승업은 조선 후기 「방황학산초추강도」·「기명절지도」·「호취도」 등을 그린 화가이다. 1843년(헌종 9)에 태어나 1897년(고종 34)에 사망했다. 역관 이응헌·변원규 등의 후원 아래 당시 중국에서 유행하던 화풍을 수용했다. 화원 유숙에게 배워 회화의 기틀을 다졌고 40대 이후 원숙한 경지에 도달했다. 강렬한 필법과 묵법, 과장된 형태와 특이한 설채법이 특징이며, 문기 어린 격조보다는 뛰어난 기량이 돋보인다. 산수화, 도석·고사인물화, 화조영모화, 기명절지도, 사군자 등 여러 분야에 고루 능했고, 안중식·조석진에게 영향을 주었다.
본관은 대원(大元), 자는 경유(景猷), 호는 오원(吾園), 취명거사(醉瞑居士) 또는 문수산인(文峀山人)이다. 40세를 전후하여 화명이 높아지자 왕실의 초빙을 받아 작품을 제작하기 위해 감찰이란 관직을 제수받았다.
장지연(張志淵)의 『일사유사(逸士遺事)』 장승업전에 의하면 그는 일찍 부모를 여의고 몹시 가난하여 의탁할 곳이 없다가 수표교(水標橋) 부근에 살고 있던 역관(譯官) 이응헌(李應憲 : 서화금석 수장가 이상적의 사위)의 집에 기식하면서 어깨너머로 글 공부와 원(元) · 명(明) 이래의 명적(名蹟)들을 접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그는 역관 출신으로 한성판윤(漢城判尹)을 지낸 변원규(卞元圭)의 집에서 지냈고, 조선말기 유명한 정치가이자 서화가인 오경석(吳慶錫)의 동생인 오경연(吳慶然)의 집에 출입하며 당시 중국에서 유행하던 화풍을 직접적으로 수용할 수 있었다. 실제 『시중화(詩中畵)』, 『고금명인화교(古今名人畵穚)』, 『인재화승(紉齋畵賸)』 등의 중국 화보를 임모하기도 했다.
그는 술과 여자를 몹시 좋아하여 미인이 옆에서 술을 따라야 좋은 그림이 나왔다고 하며, 아무것에도 얽매이기를 싫어하는 방만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때문에 그의 예술에 대한 순수한 열정을 “그의 예술안(藝術眼)에는 왕자(王者)나 부호(富豪)가 다 없었다”고 하였다. 그의 이러한 기질은 강렬한 필법(筆法)과 묵법(墨法) 그리고 과장된 형태와 특이한 설채법(設彩法)을 특징으로 하는 그의 작품들에서도 엿볼 수 있다.
그는 산수화, 도석(道釋) · 고사인물화(故事人物畵), 화조영모화(花鳥翎毛畵), 기명절지도(器皿折枝圖), 사군자(四君子) 등 여러 분야의 소재를 폭넓게 다루었다. 전반적으로 문기(文氣) 어린 격조보다는 뛰어난 기량이 돋보인다. 초기 19세기 대표적인 화원(畵員) 유숙(劉淑)에게 배워 회화의 기틀을 다졌으며 40대 이후 그림이 원숙한 경지에 도달하여 대화가의 명성을 얻었다.
산수화는 원말사대가(元末四大家) 가운데 황공망(黃公望)과 왕몽(王夢)의 그림에 근거하고 있으며, 청나라 초기의 사왕오운(四王吳惲) 계통의 각종 남종화풍과 각체의 북종화풍을 함께 소화하여 그렸다. 또한 새로운 개성을 보이는 양주화파(揚州畵派)와 해상화파(海上畵派)의 근대적 화풍을 소화하였다. 특히 기명절지에서는 청나라 말의 조지겸(趙之謙), 오창석(吳昌碩) 등의 화풍과 근대 감각이 엿보이는 음영법(陰影法)을 수용하기도 하였다.
그의 이러한 화풍은 조선 말기의 회화를 마지막으로 꽃피우면서 그를 사사한 안중식(安中植)과 조석진(趙錫晋)에게 전하여져 우리나라 근대 회화의 토대를 이루었다.
대표작으로 30대 기년작인 서울대학교박물관 소장 『근역화휘(槿域畫彙)』에 포함되어 있는 「방황학산초추강도(仿黃鶴山樵秋江圖)」(1879년), 간송미술관 소장의 「삼인문년도(三人問年圖)」, 「산수도」, 「귀거래도 歸去來圖」, 「기명절지도」,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의 『홍백매십곡병(紅白梅十曲屛)』, 「호취도(豪鷲圖)」, 「고사세동도(高士洗桐圖)」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