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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기 기마인물형 명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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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기형(器形)이나 동물을 본떠서 만든 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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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어떤 기형(器形)이나 동물을 본떠서 만든 토기.
내용

흙으로 만든 인형이라는 뜻이다. 넓은 의미에서는 사람의 모습을 갖춘 것만이 아니고 다른 여러 가지의 동물·생활용구·집 등 모든 표상물(表象物)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고대의 토우는 장난감이나 애완용으로 만들어진 것, 주술적인 우상(偶像)으로서의 성격을 가진 것, 무덤에 넣기 위한 부장용(副葬用)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러한 것들은 비단 흙뿐 아니라 동물의 뿔이나 뼈, 나무 등으로 만든 것도 있고 드물게는 짚이나 풀 등으로 만든 것도 있다. 그러나 현존하는 유물은 흙으로 만든 것이 가장 많으므로 일반적으로는 토우라는 범위 안에서 설명되고 있다.

토우는 동양이나 서양에서 모두 제작되었고, 제작 목적이나 용도도 대체로 비슷하다. 로마나 희랍의 테라코타는 장난감 또는 애완용이라고 해석하고 있으나, 대부분은 주술적이거나 부장물로 제작되었다고 생각된다.

주술적인 우상으로 만들어진 경우는 유방이나 엉덩이를 크게 과장한 여성상이거나 임신한 어머니의 모습을 표현한다. 이것은 여성의 출산력을 통한 생각에서 비롯된 것으로 풍요를 기원하는 여신(女神) 또는 모신(母神)으로서 숭배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선왕조시대(先王朝時代)의 이집트나 신석기시대의 메소포타미아·영국 등지에서는 성기를 과장한 남성상도 보인다. 중국에서는 앙소문화기(仰韶文化期) 이래 토우가 보이고 있는데, 은대(殷代)부터는 토용(土俑)이라 일컫고 무덤에 넣는 부장품으로서의 성격이 뚜렷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토용은 사자(死者)에 대한 봉사자로서 무인(武人)·예인(藝人), 그리고 동물이나 생활용구들을 제작하여 함께 부장하며, 그 중에는 장례나 무덤을 지키기 위한 독특한 인물용(人物俑)이 부장되기도 한다.

일본에서는 조몬시대(繩文時代)의 중기부터 토우가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초기의 것은 극히 간단한 모양이었으나 차츰 팔다리가 뚜렷해지고 때로는 대단히 형식적으로 변한 것도 보인다. 또 일부러 신체의 어느 한 부분을 깬 것도 있다. 이것은 인간의 몸에 닥친 어떤 병이나 재앙을 토우에게 전가시키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고분시대(古墳時代)에는 하니와(埴輪)라 부르는 독특한 토우들이 다수 제작되어 널리 알려져 있다.

우리 나라는 삼국시대의 신라·가야에서 출토례가 풍부하고 다채로운 면모를 가지고 있다. 고려시대에 오면 그 예가 훨씬 줄어들어 다만 몇 개가 알려져 있을 뿐이다. 조선시대에 이르면 자기로 만들어 부장하는 예가 나타나는데, 이들은 일반적으로 명기(明器)라 부르며 역시 인물·동물·생활용구 등을 많이 만들었다.

따라서, 토우라 함은 그 재료도 다양하고 시대의 폭도 넓은데 우리 나라에서는 일반적으로 신라시대의 것을 뜻하며, 토우 또는 신라토우라 총칭되고 있다. 현재까지 전해져 오고 있는 세계의 토우들은 그들이 지닌 소박함이나 때로는 뛰어난 예술성으로 인하여 높이 평가되고 있으며, 또 그들이 지닌 성격이나 다양한 모습에서 시대적인 신앙 내지는 외형에서 보이는 복식의 연구를 위해서도 주목되고 있다.

삼국시대 신라·가야의 유물 중에는 어떤 기명(器皿)이나 동물·가옥을 본뜬 독특한 토기가 있다. 또, 말을 탄 인물 또는 배를 탄 인물 등 갖가지 동작을 나타낸 것들이 많이 알려져 있다. 이들은 중국의 토용이나 일본의 하니와와 서로 통하는 성격을 가진 것으로, 흔히 이형토기(異形土器)라 일컬어 왔다.

이형토기라는 말은 토기의 일반적인 통념(通念)인 그릇 종류와는 다른 형태로 표현되었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다. 그러나 이들은 중국의 토용이나 일본의 하니와가 여러 가지 형태를 표현하고 있는데도 통틀어 토용 또는 하니와라 일컫듯, 토우라 총칭하여도 무방하리라 생각된다.

다만 신라의 토우는 이렇게 독립된 형태를 갖춘 경우와 다른 그릇에 장식용으로 쓰인 작은 토우의 두 가지로 크게 나눌 수 있다. 따라서, 신라의 토우는 독립된 형태이면서 가운데가 비어 있는 형태의 상형토기와 토용, 그리고 장식용의 작은 토우로 구분할 수가 있다. 그런데 지금까지 상형토기는 이형토기라 부르고 장식용 토우만을 토우라고 불러 왔으므로 토우란 용어는 넓은 의미와 좁은 의미로 구분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상형토기나 토용은 크기에 있어서나 조형기술의 정교하고 뛰어난 점에서 일찍부터 그 예술성이 알려진 것들로서 그 수량도 적지 않은 양에 이른다. 이들 상형토기 중에서 출토지가 분명한 것은 경주금령총(金鈴塚) 출토의 기마인물형(騎馬人物形)과 인물주형(人物舟形) 토기가 각기 한 쌍씩 알려져 있고, 그 밖에 경주 계림로(鷄林路) 제25호분의 옹관묘(甕棺墓)에서 출토된 차형토기(車形土器), 경주시미추왕릉(味鄒王陵) C지구 제3호분에서 나온 신구형토기(神龜形土器)가 알려져 있다.

출토지가 분명하지 않은 예로 대구의 달성 또는 현풍 일대에서 출토된 것으로 전해지는 예 가운데 차형토기·가형토기(家形土器)·동물형토기 등은 그 모양이 다채롭고 독특한 솜씨로 뛰어난 것이 많다. 이들 중 오리형토기〔鴨形土器〕·마형토기(馬形土器) 등은 전해진 바로는 모두 대구에서 함안에 이르는 낙동강 유역의 출토물로서, 이 지역을 동물형토기의 발상지로 보는 견해도 있다.

따라서 이 동물형 토기는 가야 지방에서 발생하여 경주 지방으로 전파된 것이 아닌가 한다. 그 밖에 차형토기나 가형토기도 대체로 그 출토지는 이 지역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출토 상태나 또는 반출 유물들이 알려져 있지 않아 학술적인 검토에 지장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므로 이들 토기의 사용목적이나 성격에 대해서는 단언하기 어려우나 크게 두 가지의 성격 또는 복합적인 면을 찾아볼 수 있다.

그 하나는 어떤 기원을 담아서 행사나 의례에 쓰인 토우를 들 수 있다. 우리 나라의 토우 중 조형토기·오리형토기 등은 출토예가 적지 않아서 새에 대한 해석을 가능하게 하고 있다. 오리형토기는 물과 관계되는 어떤 의식, 예를 들면 기우(祈雨) 등의 행사에 관계되는 것으로도 해석되고 있다. 중국의 토용에도 ‘관풍조(觀風鳥)’라 하여 무덤 속에 반드시 부장하는 명기로 조형토기가 있다.

한국 고대사회에서도 새에 대한 신앙이 보이고 있어서 사람이 죽으면 그 영혼을 새가 사후세계에 인도하며, 새는 또 그 세계에의 안내역이 된다고 믿고 있었음은 ≪삼국지 三國志≫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 변진조(弁辰條)의 기록에도 보이고 있다. 일본에서도 유해의 가슴에서 새의 뼈가 발견되거나 나무로 만든 새가 함께 출토된 예가 있다.

또 하나의 성격은 대부분의 경우 토우를 부장품으로 생각하는 경향이다. 아마도 복합적인 장례 등의 의식이 거행된 다음 부장된 것으로 해석되는 가장 뛰어난 예로 경주 금령총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들 수 있는데, 그 중에 기마인물토기·인물주형토기·등잔형토기가 각기 한 쌍씩 반출되었다. 이들은 목관을 놓고 그 머리 부분에 해당하는 곳에 부장된 상태로 발견되었다.

완전하게 마구(馬具)를 갖춘 말 위에 당당한 모습으로 앉은 기마인물형의 두 인물은 복식이나 마구의 형태로 보아 주종 관계로 해석되어, 그것이 토우로서의 성격을 밝히는 중요한 구실을 하고 있다. 말은 희생의 하나로 인정되고 있다. 이러한 말에 무덤의 주인공과 그 하복(下僕)으로 보이는 인물이 각기 타고 있기에 특수한 성격이 부여되는 것이다.

함께 출토된 인물주형토기의 인물은 혀를 내밀고 약간 짓궂은 모습으로 배를 젓는 모습까지 잘 나타내고 있다. 고대인에게 배나 말이 뛰어난 수송수단으로 평가되었던 사실을 생각한다면, 이 수송용 배나 말이 죽은이의 영혼을 태워서 저승세계로 건너간다는 해석은 대단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게다가 등잔형토기가 함께 있다는 사실은 무덤의 축조 과정에서 제례에 쓰였다고 하는 해석이 가능하다. 이러한 등잔의 기능은 공주 무령왕릉 묘실 속에 있던 5개의 등잔과도 상응하는 것이다.

이 밖에 경주에서 출토된 것이 확실한 차형토기나 신구형토기 등도 어떤 장례의식에서 구실을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알려진 가옥형토기·동물형토기·주형토기·신구형토기 등도 이러한 의식과 명기의 성격을 갖추었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어쨌든 이들 토우는 당시 사람들의 뛰어난 조형감각을 잘 나타내고 있다. 오리형토기가 지닌 그 독특한 개성미나 작은 집 위에 살짝 올라앉은 작은 동물의 정감어린 모습은 당시 사람들의 정조(情調)를 잘 표현하고 있다.

또, 상형토기도 아니고 장식용으로 쓰인 작은 토우와도 달리, 다만 토우라고만 알려진 한 떼의 유물이 전하고 있다. 대체로 말을 탄 인물 또는 주악상(奏樂像)을 필두로 하여 남자상·여자상이 있는데, 앞에서 본 예보다는 작고 솜씨는 간결한 듯 하지만 역시 풍부한 표정이나 동작으로 주목받고 있다.

그런데 최근에 경주 장산의 석실묘, 용강동과 황성동의 석실고분에서 뚜렷한 토용의 출토례가 보이면서 부장용으로서의 토용의 성격을 밝혀 주었다. 이들은 신분을 드러내는 복식과 자세를 보이고 있으며, 서역인의 모습도 보이고, 청동제의 십이지상도 나왔다.

1926년 경주 황남리 고분군의 경주구역 확장공사에서 수많은 장경호(長頸壺)·고배(高杯) 등이 출토되었는데, 어깨·목 또는 뚜껑 위에 작은 토우가 붙어 있었다. 발굴 과정에서 작은 장식토우들을 토기에서 따로 뜯어내 보관하는 과오를 저질러 원래의 배치 상태는 알지 못한 채 보존되어 왔다. 이렇게 토기에서 분리된 작은 토우들은 모두 10㎝ 미만의 것으로 어떤 것은 2∼3㎝ 미만의 경우도 있다.

이들 토우는 소박한 솜씨가 주목된다. 인물과 동물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데 원래의 상태가 분명하지 못한 점은 애석하다. 그런데 근래 경주 미추왕릉지구의 한 고분에서 출토된 토우장식항아리〔土偶裝飾長頸壺〕와 구덕수궁미술관 소장의 쌍록장식항아리〔雙鹿裝飾壺〕 등으로 미루어 그 모습을 짐작해 볼 수 있게 되었다.

경주 미추왕릉지구 계림로 제16지구의 고분군 중 제30호분에서 출토된 것은 높이 34㎝, 구경 23㎝ 내외의 목이 긴 항아리인데 어깨와 목 부위에 5㎝ 크기의 임신한 여인이 가야금을 켜는 모습을 비롯하여 남녀의 성행위 장면, 뱀·개구리·새·거북·오리 등 작은 토우가 들러붙어 있다.

또 경주 노동동 제11호분에서 출토된 높이 40㎝의 항아리에는 긴 지팡이를 가진 남자가 다른 한 쪽 손으로는 크게 과장한 성기를 붙들고 서 있는 모습을 비롯하여 역시 뱀·개구리·새·오리·거북 등이 붙어 있다.

쌍록장식항아리는 앞의 장경호보다는 훨씬 섬세하게 다듬어진 두 마리의 사슴이 나란히 어깨 부위에 붙어 있다. 따라서 황남리출토의 작은 토우들은 원래 이러한 상태로 만들어졌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현재 남아 있는 이들 유물 중에는 고배의 뚜껑에 붙어 있는 뱀·개구리·게·물고기 등이 전하고 있을 따름이다.

이들 토우는 인물과 동물의 두 가지로 나누어지는데, 인물은 인체의 어느 부분을 과장해서 표현하거나 성행위의 사실적인 묘사와 관(冠) 혹은 의복의 표현 등이 유난히 간결하면서도 풍부한 감정표현이나 율동적인 육체의 묘사 등에서 토우예술의 단면이 넉넉히 짐작된다. 동물에는 말·개·돼지·사슴·토끼·호랑이·거북·새·오리·닭·게·개구리·뱀과 갖가지 물고기가 있다. 이들을 조금 더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토우에 나타난 인물상

구석기시대 이래 유럽·메소포타미아·흑해연안·시베리아 등 세계 각지에서 육체의 한 부위를 과장되게 표현하거나 특히 눈길을 끄는 여인상이 많이 만들어지고 있다. 머리는 작게 하여 얼굴에는 눈이나 코·귀가 거의 생략되고 기형으로 보일 만큼 빈약한 팔과 다리를 가지고 있으나, 여성의 성적인 특징을 과장해서 나타낸다.

임신한 여인의 성기만을 두드러지게 나타낸 여인상은 분명히 풍요다산(豊饒多産)의 신앙과 관련된다. 신라의 토우 중에도 비슷한 여인상이 많이 있다. 아주 작은 토우인데도 유방이나 엉덩이를 과장하거나 아니면 임신한 상태를 나타냄으로써 무엇인가 의미를 가지게 한 것 같다. 이러한 해석을 더욱 강렬하게 하는 것은 여인상이 남자상보다 크게 표현된 점이다.

이에 반해 일본 하니와의 여인상은 대체로 무녀(巫女)와 같은 특수한 신분의 여인으로 해석되거나 어머니임을 강조하는 동작, 즉 아이를 안거나 업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중국의 토용에 보이는 여인상은 내관(內官) 등 신분이 높거나 무희(舞姬) 등의 특수한 여인이 많이 나타난다. 그러나 신라토우의 여인상은 임신한 여인이나 성애 장면을 나타낸 점이 특이하다.

이에 비하여 남자상은 훨씬 많고 그 모습도 다양하다. 여자상과 마찬가지로 성기를 과장하여 노출시킨 것이 적지 않으며, 그 밖에 두 눈이나 코·입·귀까지 갖춘 남자상이 많이 보인다. 머리를 다듬어 관모(冠帽)까지 쓰거나 팔다리로 어떤 동작을 나타내거나 잡기를 하고, 가면을 쓰거나 다리를 꼬고 앉은 모습 등이 있는가 하면, 무사(武士)인 듯 큰 칼을 찬 남자가 투구까지 쓴 모습도 있고, 괭이를 어깨에 맨 농부, 노래하거나 악기를 다루는 남자도 있다.

인간의 감성을 나타낸 예로서는 기쁨에 넘치는 얼굴이 있는가 하면,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듯 통곡하는 슬픈 얼굴, 여유 있는 웃음이 담긴 노인의 얼굴 등 하나하나가 친근감 넘치는 토우들이다.

(2) 토우에 나타난 동물상

아득한 원시시대 이래 동물은 인간에게서 뺄 수 없는 존재였다. 때로는 공포의 대상이 되고 식량의 대상이 되기도 했을 것이며, 또 어떤 때는 생활을 함께하는 친구가 되고 그 힘을 제공하는 노동력의 원천이 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동물에 대한 갖가지 표현은 동굴이나 바위에 새겨진 벽화로 나타나기도 하고 토용·토우로도 나타나며, 또 동양에서는 십이지(十二支)같이 구체성이 부여되기도 하였다.

고대의 제례에는 반드시 동물이 희생으로 바쳐지기도 하였다. 이러한 동물에 대한 생각은 신라·가야인에게도 뒤지지 않아서 기마인물토기나 오리형토기는 물론 신구형토기 같은 상상의 동물까지 뛰어난 솜씨로 만들어졌다. 작은 장식용 토우에서도 많은 동물을 볼 수 있다. 개·말·소·돼지·호랑이·사슴·토끼·새·오리·닭·뱀·게·개구리·물고기·거북·불가사리 등 헤아릴 수 없는 종류에 이른다.

쭉 뻗은 다리, 쫑긋하게 세운 귀, 늘어진 혀 등 귀여운 개의 모습이 있는가 하면, 먹이를 쫓듯 맹렬한 기세로 뛰어오르려는 사냥개의 모습은 박진감이 넘친다. 이들 토우에서 보이는 멧돼지는 날카로운 주둥이나 등줄기가 잘 표현되고 있는데, 사냥에서 잡힌 듯 네 다리가 묶인 채 말 잔등에 실린 모습도 있다.

말들은 대체로 마구를 갖춘 상태로 나타난다. 사슴의 기다란 목, 토끼의 독특한 귀와 놀란 듯한 눈은 그 작은 모습 속에서도 놀라운 솜씨를 잘 나타내고 있다. 둥근 반점이 그려진 표범, 줄무늬로 표현된 호랑이, 둥글게 움츠린 거북이 있고, 중국의 토용에서 보이는 관풍조(觀風鳥)를 잘 닮은 새와 닭도 있다. 뱀은 힘껏 길게 늘이고 입으로는 개구리의 뒷발을 물고 있는 자세로 표현된다. 물 속에 뛰어들 듯한 자라, 집게발까지 나타낸 게는 친근미가 넘친다.

물고기는 원시 어로생활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식생활에 뺄 수 없는 자원이었다. 따라서 물고기는 고대 유물 유적에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신라의 토우에도 많은 종류의 물고기가 나타나고 있는데 마치 한 폭의 정물화인 듯 잘 다듬어진 물고기가 보이는가 하면, 동글동글하게 비늘까지 나타낸 살진 물고기도 있다.

울산 암각화 중의 물고기, 사람머리에 물고기의 몸뚱이를 하고 있는 중국 당송(唐宋) 때의 토용같이 신라토우의 물고기도 그 모습만이 아니라 성격을 규명하는 데 주목할 만한 유품(遺品)이라 하겠다.

신라토우 중에는 당시의 풍습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 있다. 가옥형토기의 외형을 보면, 고상건물(高床建物)의 모습을 짐작하게 하는 형태로 앞쪽에 자그마한 사다리가 놓인 형식이라든지 지붕의 골을 처리한 점 등은 당시 가옥을 복원하는 데 기여하는 구실도 한다. 갖가지의 배모양, 심지어는 신발의 모양까지를 짐작하게 하는 좋은 본보기가 있으며, 금령총출토 기마인물상의 말이 착장(着裝)한 각종 마구의 형태는 신라고분에서 발견되는 많은 마구의 용도를 규명하는 데 큰 구실을 하고 있다.

한편, 장식용 토우는 과감하다 할 정도의 생략기법을 쓰고 있는데도 결코 기량이 뒤지지 않음을 쉽게 알 수 있다. 큰 것이 10㎝ 내외임에도 표현된 어느 부분이나 동작으로써 충분히 작자의 의도한 바가 표출되고 있다. 여인상의 경우, 얼굴만으로는 도저히 구분할 수 없을 만치 간결한 수법을 쓰면서 그가 여인임을 곧 알게 한다.

슬픔이나 기쁨 등 감정을 나타낸 토우에서도 크게는 동작에서 읽을 수도 있으나, 대부분의 경우 눈의 표현만으로 기쁨과 슬픔을 판별할 수 있고, 이목구비가 모두 생략되었으면서도 몸을 쪼그려 엎드린 모습이나 두 다리를 내뻗은 자세에서도 통곡하는 모습이 나타난다. 두 손을 가슴에 대고 있는 자세만으로도 충분히 슬픔의 분위기를 느끼게 하며, 손톱으로 꾹 찍은 듯한 두 눈만으로도 그가 지닌 감정을 읽을 수가 있다.

이상의 토우들은 그 공예적인 기법이 두드러진 면에서도 주목해야 할 유물이며, 이들이 지닌 성격은 분명히 밝혀져야 한다. 독립상형의 토우이건 장식용의 토우이건 이들은 당시의 우주관(宇宙觀)이나 사생관(死生觀)을 해석하는 데 중요한 구실을 하며, 외형상의 관찰만으로도 당시의 생활상·사회상을 짐작하게 하는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참고문헌

『신라의 토우』(이난영,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76)
「삼국시대동물형토기시고」(김원룡, 『미술자료』 6, 국립중앙박물관, 1962)
『中國の土偶』(佐藤雅彦, 東京 美術出版社, 1965)
『陶磁大系』 3-埴輪-(小林行雄, 東京 平凡社, 1974)
『埴輪の古代史』(增田精一, 東京 新潮社, 1976)
『日本陶磁全集』 3-土偶·埴輪-(小林達雄·龜井正道, 東京 中央公論社, 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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