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중섭(仲燮), 호는 탄은(灘隱). 세종의 현손으로 익주군(益州君) 이지(李枝)의 아들이다. 석양정(石陽正: 正이란 조선 때 비교적 가까운 왕손에게 준 작호로 정3품 堂下에 해당함)에 봉해졌다. 뒤에 석양군(石陽君)으로 승격되었다.
묵죽화에 있어서 그는 유덕장(柳德章)·신위(申緯)와 함께 조선시대 3대 화가로 꼽힌다. 그는 묵죽화뿐 아니라 묵란·묵매에도 조예가 깊었고, 시와 글씨에도 뛰어났다. 그는 임진왜란 때 적의 칼에 오른팔을 크게 다쳤으나 이를 극복하고, 회복 후에는 더욱 힘찬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지금 남아 있는 조선 초기의 묵죽화들이 대개 수문(秀文)의 묵죽화와 같이 줄기가 가늘고 잎이 큰 특징을 보인다. 이에 반하여, 이정의 묵죽은 줄기와 잎의 비례가 좀 더 보기 좋게 어울리며, 대나무의 특징인 강인함을 잘 나타내고 있다. 그는 특히 굵은 통죽(筒竹)을 잘 그렸는데, 통죽의 굵은 입체감을 두드러지게 표현하였다. 즉, 통죽의 마디를 묘사함에 있어서 양쪽 끝이 두툼하게 강조된 호형선(弧形線)으로 마디의 하단부를 둘렀다. 그리고 거기에서 약간의 간격을 떼고 아랫마디를 짙은 먹으로 시작해서 점차로 흐려지게 하였다. 이 기법은 조선 후기의 여러 묵죽화가들에 의하여 널리 쓰이게 되었다.
그는 「풍죽도」에서 대나무의 줄기와 잎이 바람에 나부끼는 모습을 정확하게 포착하여 대나무의 탄성(彈性)을 잘 나타내었다. 화면의 공간감(空間感)을 살리기 위해 짙은 먹과 흐린 먹의 구별이 뚜렷한 대나무들을 대조시켰다. 또한 묵죽화 또는 묵란화에서 그는 당시 유행하였던 절파 화풍(浙派畫風)의 영향을 받아 강한 농담의 대조를 사용한 토파를 묘사하였다.
같은 시대의 최립(崔岦)과 허균(許筠)은 그의 묵죽화의 자연스러움과 사실성을 칭찬하였다. 그리고 이정구(李廷龜)는 “소동파(蘇東坡)의 신기(神氣)와 문동(文同)의 사실성을 모두 갖추었다.”고 하였다.
그가 접할 수 있었던 중국의 묵죽화는 송대(宋代)의 것보다 명대(明代)의 것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그는 소동파나 문동의 묵죽 양식도 하창(夏昶)이나 또는 그 뒤를 따른 주단(朱端) 등의 명대 화가들에 의하여 변형된 것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강한 필력과 잘 잡힌 구도를 보이는 이정의 작품들은 조선 묵죽화의 최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년작(記年作)으로는 간송미술관(澗松美術館) 소장인 검은 비단 바탕에 금니(金泥)로 그린 「죽도(竹圖)」가 만력갑오(萬曆甲午), 즉 1594년에 해당하여 연대가 가장 이른 작품이다.
만년작으로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우죽도(雨竹圖)」가 있다. 여기에는 천계임술(天啓壬戌), 즉 1622년의 연대가 적혀 있다. 이밖에도 낙관이 있는 묵죽화는 많이 전한다.
이정이 인물화를 그렸다는 기록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작품으로 전하는 「문월도(問月圖)」 두 폭(개인소장)이 알려져 있다. 이들 두 그림은 모두 절파 양식을 강하게 보이는 인물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