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임당 초충도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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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신사임당 초충도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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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여류 화가 신사임당(申師任堂)의 작품으로 전해 오는 초충도(草蟲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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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중기의 여류 화가 신사임당(申師任堂)의 작품으로 전해 오는 초충도(草蟲圖).
개설

1971년 강원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신사임당이 그린 초충도 10폭 병풍으로 종이 바탕에 수묵담채로 그렸다. 크기는 세로 48.5㎝, 가로 36.0㎝이다. 강원도 강릉시 오죽헌(烏竹軒)의 율곡기념관(栗谷紀念館)의 소장품이다.

내용

원래는 화첩으로 되어 있었을 것으로 보이나 현재는 숙종 때의 문신 정호(鄭澔)의 발문 한 폭과 민태식이 옮겨 쓴 이은상(李殷相)의 발문 한 폭 등 총 10폭의 작은 병풍으로 꾸며져 있다.

각 폭에 그려진 내용을 살펴보면, ① 오이와 메뚜기, ② 물봉선화와 쇠똥벌레, ③ 수박과 여치, ④ 가지와 범의 땅개, ⑤ 맨드라미와 개구리, ⑥ 가선화와 풀거미, ⑦ 봉선화와 잠자리, ⑧ 원추리와 벌 등이다.

정호의 발문은 처음부터 그림과 함께 있었던 것이 아니라 신성윤(辛聖潤)의 9대 손인 신명선(辛明善)의 집에 보관되었던 문서 중의 하나이다. 신명선은 발문과 그림을 함께 표구하여 강릉시 강동면 안별리 송담서원(松潭書院)에 안치하였다고 한다. 이 발문에는 정호가 1655년(효종 6) 송담서원을 방문했을 때 이 그림을 보고 사임당의 그림 솜씨에 감격하였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송담서원은 조선 인조 때 율곡(栗谷)이이(李珥)를 제사하기 위해 세워졌다. 『강릉읍지(江陵邑誌)』에 의하면, 1804년(순조 4) 3월에 큰 화재로 인하여 건물이 모두 소실되었다고 하는데, 서원에 보관되어 있던 이 그림이 어떻게 화재를 모면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이은상의 발문에 따르면, 사임당의 아들 옥산(玉山) 이우(李瑀)의 후손인 이장희(李璋憙)가 이 그림들을 강릉에서 발견하여 율곡기념관에 기증했다고 한다. 현재는 이와 같은 내용의 발문이 모두 그림과 같이 병풍으로 표구되어 있으나 완전히 실증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림의 보관 상태는 물에 한 번 씻은 듯이 상당히 흐리다. 거의 모든 화폭이 화면의 중심에 몰골법(沒骨法)으로 간단하게 풀 한 포기와 곤충 몇 마리를 평면적으로 그린 것들이다.

제1 · 5 · 8폭에만 지면(地面)이 약간 표현되었을 뿐 다른 폭들은 풀들이 그냥 공중에 떠 있는 듯 그려졌다. 그 중 제1폭(오이와 메뚜기)과 제3폭(수박과 여치)은 필치와 채색이 비교적 섬세한 편이다.

소재나 구도는 사임당의 작품으로 전해지는 다른 그림들과 유사하지만, 진위(眞僞) 여부를 가리기는 힘들다. 풀 한 포기와 곤충, 작은 동물들을 배합하는 구도는 중국 오대(五代)로부터 나타나 원대(元代)의 화조화가 여경보(呂敬甫)의 작품으로 이어지면서 발전하였다. 여경보의 작품이 언젠가 일본으로 전래되어 지금까지 전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이와 같은 구도가 고려시대 이후 우리나라에도 전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문헌

『(신사임당 가족의)시서화』(관동대학교 영동문화연구소 편, 강릉시, 2006)
『사임당의 생애와 예술』(이은상, 성문각, 1977)
「조선시대 여류화가 연구」(이성미, 『미술자료』51, 국립중앙박물관, 1993)
집필자
이성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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