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자고(子固) 또는 성유(聖攸), 호는 수운(峀雲) 또는 가산(笳山). 묵죽화를 잘 그렸다는 진동(辰仝)의 6대손이며, 혁연(赫然)의 종손, 성삼(星三)의 아들이다. 벼슬은 종2품인 동지중추부사를 지냈다.
유덕장은 조선 중기의 이정(李霆)과 조선 후기의 신위(申緯)와 함께 조선시대의 3대 묵죽화가이다. 유덕장과 같은 시대 인물인 신광수(申光洙)는 『석북집(石北集)』에서 유덕장의 묵죽화를 “당세의 짙푸른 수운의 대나무는 속세를 벗어나 그 기세가 드높다(當世蒼蒼峀雲竹塵埃掃出勢崢嶸).”라고 썼으니, 유덕장의 대나무 그림은 그 당시 이미 높은 평가를 받았던 것을 알 수 있다.
유덕장은 이정의 묵죽화풍을 이어받았다고 한다. 지금 남아 있는 많은 작품들이 이를 증명해 주고 있다. 그 중에도 특히 대가 굵은 통죽(筒竹)을 그리는 기법은 이정의 것을 거의 그대로 따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다만, 유덕장은 대나무의 마디를 강조하는 선을 거의 직선에 가깝게 그어 마디 부분의 입체감이 이정의 대나무만큼 두드러지게 나타나지는 않고 있다.
그 밖에도 풍죽(風竹) 또는 설죽(雪竹)을 그릴 때 짙은 먹의 대나무와 그보다 훨씬 엷은 먹의 대나무를 대조시켜 그들 서로간의 거리감을 나타내는 수법도 이정의 것을 따랐다.
다만, 토파(土坡 : 흙으로 쌓아 올린 둑)를 그리는 데는 이정보다 간단하게 선으로만 그리든지 음영(陰影)을 조금 넣고 끝이 뾰족한 점을 수직으로 찍기도 하였다. 그러나 대나무 잎을 묘사한 필치 또는 먹의 농도 조절 면에서 볼 때 유덕장은 이정의 수준에 미치지 못함을 알 수 있다.
이 점은 김정희(金正喜)에 의하여 지적된 바 있다. 즉, 그는 유덕장의 묵죽화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썼다. “수운의 대나무는 힘 있고도 고졸(古拙)하며 마치 금강저(金剛杵: 금강역사의 무기)를 갖추고 있는 듯하다. 탄은(灘隱)에 비하면 조금 못한 것 같으나 깊이 없는 요즘 화가들로 말하면 모두 이와 거리가 멀어 비슷하지도 못하다.” 이렇듯 김정희는 유덕장의 묵죽화가로서의 위치를 공정하게 평가하고 있다.
지금 남아 있는 작품 중 연대가 기록된 것은 「설죽(雪竹)」(1746년, 간송미술관 소장)·「설죽도(雪竹圖)」(1748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신죽도(新竹圖)」(1751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등이 있다. 이들 기년 작은 유덕장의 그림 중 필치나 구도, 먹의 사용법 등으로 볼 때, 가장 높은 수준의 작품이다.
또한 이 그림들은 5, 6년 사이에 그린 한 사람의 솜씨라고 볼 수 있을 만큼 양식이나 기법상의 공통점을 보이고 있다. 위의 작품들과 비슷한 수준의 그림으로는 「황강노절(黃岡老節)」(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이 있고, 그 밖에 8폭병풍(서강대학교박물관 소장)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