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숙춘(叔春), 호는 죽당(竹堂). 유열(柳悅)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유자문(柳子文)이다. 아버지는 유한평(柳漢平)이며, 어머니는 홍귀해(洪貴海)의 딸이다.
1522년(중종 17) 사마시를 거쳐 1531년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검열이 되었고, 승정원주서에 제수되어서는 스스로를 엄격히 지키고 권귀(權貴)에 아부하지 않아 탄핵되기도 하였다.
1537년 사헌부감찰이 되고 이어 병조좌랑 겸 춘추관기사관이 되었고, 시강원사서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1538년 사간원정언을 거쳐 사헌부지평·시강원문학·홍문관교리·응교·장령·집의 등 여러 청환직(淸宦職)을 역임하였다.
1543년 부제학에 올랐고, 이듬해 승정원동부승지·우승지, 1546년 좌승지·도승지를 차례로 거쳤다. 1548년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공조참판, 이듬해 전라도관찰사를 지내고, 1550년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경기도·평안도 관찰사를 지냈고 1554년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으나, 이 때 경연(經筵)에서 『주역』을 진강하게 되어 『주역』에 밝은 자를 고르게 됨으로써 다시 기용되었다.
이어서 한성부좌윤·함경도관찰사를 거쳐 공조판서에 오르고, 1559년 오위도총부도총관을 겸직하던 중 중풍을 얻어 사직을 청하니 왕이 공조판서를 바꾸고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로 임명하였는데, “일을 하지 않는데 어찌 그 녹(祿)을 먹을 수 있는가?” 하며 받기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문사(文詞)에 뛰어났고, 죽화(竹畫)를 잘 그렸다. 글씨에도 뛰어나 남대문의 ‘숭례문(崇禮門)’을 썼다는 설도 있다. 시호는 정민(貞敏)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