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문욱(文郁), 호는 유춘(有春)·고송유수관도인(古松流水館道人)·자연옹(紫煙翁).
도화서(圖畫署) 화원으로 첨절제사(僉節制使)를 지냈다. 김홍도(金弘道)와 동갑 화원으로 가깝게 지냈으며, 강세황(姜世晃)·남공철(南公轍)·박제가(朴齊家)·신위(申緯) 등의 문인화가들과도 친교하였다.
산수·포도·영모(翎毛)·도석 인물(道釋人物) 등 다방면에 걸쳐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였다. 당시 화단을 풍미하던 진경산수(眞景山水)나 풍속화보다는 전통적인 소재를 많이 다루었다. 특히 송림(松林)을 즐겨 그려 이 방면에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였다. 명암(明暗)이 엇갈리고 몸이 뒤틀린 모습의 소나무와 가늘게 솟아오른 나목(裸木) 그리고 5각형의 바위들을 특징 있게 묘사하였다.
그는 남종화(南宗畵: 학문과 교양을 갖춘 문인들이 비직업적으로 기법에 얽매이거나 사물의 세부적 묘사에 치중하지 않은 채 수묵 또는 수묵담채로 그린 그림)와 북종화[北宗畵: 화원이나 직업적인 화가들이 짙은 채색과 꼼꼼한 필치를 써서 사물의 외형 묘사에 주력하여 그린 장식적인 공필(工筆)의 그림] 각체(各體)의 화법을 혼합하여 특유의 화풍을 이룩하였다. 이러한 종합적 성격의 화풍은 심사정(沈師正)·최북(崔北)·김홍도 등의 회화 세계와 상통되는 것으로 당시 화단의 한 조류를 대변하는 것이다.
60세 이전의 그림들은 비교적 섬세한 필치로 단단하고 각이 진 모습의 선묘적 경향(線描的傾向)과 깔끔하고 청정한 분위기를 보였다. 그러나 60세 이후에는 묘사적이기보다는 강하고 대담한 발묵법(潑墨法: 글씨나 그림에서 먹물이 번져 퍼지게 하는 것) 위주의 표현적인 붓질로 한층 세련되고 격식을 초탈한 그림을 많이 그렸다.
독창적인 면에서는 김홍도에 다소 뒤진다고 하겠다. 그러나 기량이나 격조 면에서는 쌍벽을 이루었던 대표적 화원으로, 조선 후기 회화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대표작으로 조선 후기 최대의 거작으로 꼽히는 「강산무진도(江山無盡圖)」(국립중앙박물관 소장)를 비롯하여 「송하담소도(松下談笑圖)」(1805년)·「송계한담도(松溪閑談圖)」·「대부벽준산수도(大斧劈皴山水圖)」(1816년)·「누각아집도(樓閣雅集圖)」(1820년)와 「하경산수도(夏景山水圖)」(국립광주박물관 소장), 「단발령망금강도(斷髮嶺望金剛圖)」(개인 소장)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