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가 조형 행위를 시작한 이래 인간을 표현하는 작업은 지금까지 계속되었고, 앞으로도 끊임없이 이루어질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인물화는 역사적 기록이자 자화상이라 할 수 있다. 신앙 · 생활 · 사상 · 문화 등 각 시대의 관심사가 인물화를 통해서 표현되는 것이다.
회화에 있어서 인물화는 산수화와 더불어 전통 회화를 주도해간 장르이다. 초기에는 인물화가 주류를 이루다가 고려시대에 들어와서 산수화로 그 주도권이 옮겨갔다. 인물화의 종류에는 초상화(肖像畫) · 고사 인물화(故事人物畫) · 도석 인물화(道釋人物畫) · 풍속화(風俗畫) · 산수 인물화(山水人物畫) 등이 있다.
특정 인물의 자태를 그린 그림이다. 초상화는 후손에게 교훈의 의미를 주는 목적으로 제작되어 진전 · 사당 · 진영각 등 특정 장소에 봉안하고 제사 때 사용된다.
초상화의 종류로는 어진(御眞) · 공신상(功臣像) · 기로도상(耆老圖像) · 일반 사대부상 · 여인 초상(女人肖像) · 승상(僧像)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어진은 임금의 초상화로서, 기록상으로는 어용(御容) · 수용(晬容) · 진용(眞容) · 성용(聖容) · 왕용(王影) 등으로 불리어졌다. 공신상은 나라에 공이 있는 인물들에게 공신호(功臣號)를 부여함과 동시에 입각도형(立閣圖形)한 것이다. 해당 공신 및 그 자손들에게 치하와 함께 보상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귀감을 보여 주는 목적으로 제작되었다.
기로도상은 문신 · 재상으로서 70세 이상인 자가 들어가는 기로소(耆老所)의 모임인 기로회의 장면과 함께 그려진 참석자의 초상화를 가리킨다.
일반 사대부상은 공신상이나 기로도상 외에 감계적인 목적으로 제작된 사대부의 초상화이다. 유교의 발달로 인하여 사묘(祠廟) · 영당(影堂) · 서원(書院)의 건립이 증가함에 따라 많은 수의 사대부상이 제작되었다.
여인 초상은 말 그대로 여인의 초상화이다. 왕비의 진영이나 일반 사대부가의 여인상, 행실이 뛰어난 여인을 기리는 초상 등이 제작되었다.
승상은 고승의 초상화로서 진영(眞影)이라고도 불린다. 이 승상은 조사 신앙의 예배 대상으로서 선종의 영향을 받아 제작되었다. 초상화는 인물화의 핵심적인 주제로 각 시대 인물화의 특징이 초상화에 집약되어 표현된다고 볼 수 있다.
고사(故事)를 주제로 한 인물화이다. 여기서 고사란 경서(經書) · 역사적 사실 · 문학 작품에 실려 있는 내용으로서, 모범이 되거나 교훈이 되는 인물의 행적을 그린 것이다.
고사 인물화는 초상화와 더불어 초창기에 유행했던 인물화이다. 둘 다 교화적인 목적으로 제작되었다는 점에서 공통된다. 경서의 내용을 그린 고사 인물화로는 효경도 · 빈풍칠월도 · 무일도 등이 있다.
그리고 역사적 사실을 묘사한 고사 인물화로는 서원아집도(西園雅集圖) · 낙양기영회도(洛陽耆英會圖) · 설중방우도(雪中訪友圖) · 금궤도(金櫃圖) 등이 있다. 문학 작품을 표현한 고사 인물화로는 어초문답도(漁樵問答圖) · 귀거래사도(歸去來辭圖) · 구가도(九歌圖) 등이 있다.
도교와 불교에 관계되는 인물상을 표현한 그림이다. 넓은 의미의 도석 인물화는 예배화를 포함한 도교와 불교의 전체 그림을 가리킨다. 그러나 좁은 의미로는 예배용이 아닌 감상 · 교화 · 길상 등의 다른 목적으로 제작된 그림을 가리키며, 신선도 · 선종화가 주류를 이룬다.
신선도는 신선을 소재로 삼은 그림으로, 복(福) · 록(祿) · 수(壽)의 길상을 기원한다. 우리 나라에서 즐겨 제작되었던 신선도의 종류를 보면, 군선경수반도회도(群仙慶壽蟠桃會圖) · 군선경수도(群仙慶壽圖) · 파상군선도(波上群仙圖) · 신선도(神仙圖) · 수성도(壽星圖) 등이 있다.
선종화는 불교 종파의 하나인 선종에 관계되는 소재를 다룬 그림이다. 달마(達磨) · 출산석가(出山釋迦) · 한산(寒山) · 습득(拾得) · 포대 · 나한(羅漢) · 십우도(十牛圖) 등이 있다.
민간의 풍속을 그린 그림이다. 풍속화는 사인 풍속화(士人風俗畫) · 서민 풍속화(庶民風俗畫) · 사녀 인물화(仕女人物畫)로 나눌 수 있다. 사인 풍속화는 사대부의 생활상을 그린 것으로 시회도, 설중방우도 등이 전통적으로 정립된 주제이다.
서민 풍속화는 일반 백성들의 생활상을 그린 것으로 풍속화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궁중에서는 왕이 교화용으로 제작한 무일도(無逸圖) · 빈풍칠월도(豳風七月圖) · 경직도(耕織圖)가 제작된다. 이것도 역시 서민 풍속화이다. 이 가운데 무일도와 빈풍칠월도는 각기 『서경(書經)』과 『시경(詩經)』의 내용을 그린 것이므로 고사 인물화에도 속한다.
사녀 인물화는 궁중 여인들의 생활이나 자태를 그린 그림을 가리키며, 미인도(美人圖)라고도 불린다. 초기에는 궁중 여인들이 지녀야 할 규범을 비롯한 유교적인 덕목을 깨우쳐 주는 교화적인 목적으로 제작되었다. 그러나 점차 여인들의 아름다운 자태와 풍모에 관심이 옮겨지게 된다.
산수 속에 인물이 크게 부각된 그림이다. 이것은 인간이 자연을 관조하여 서로 일체가 되는 경지를 그린 그림이다.
기려도(騎驢圖) · 기마도(騎馬圖) · 관월도(觀月圖) · 관수도(觀水圖) · 관폭도(觀瀑圖) · 탁족도(濯足圖) · 예장도(曳杖圖) · 관화도(觀畫圖) 등 자연을 관조하고 속세를 초월하여 시상에 잠기거나 풍류를 즐기는 모습이 다루어진다.
선사시대에는 암각화나 청동기에 음각으로 새겨진 형상을 통해서 당시의 인물 표현을 살펴볼 수 있다. 인물 표현이 비교적 풍부한 암각화가 신석기시대 말기나 청동기시대 초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울주대곡리암각화」이다.
이 암각화에는 고래 · 거북 등 물짐승과 호랑이 · 사슴 · 멧돼지 등의 뭍짐승이 주류를 이룬다. 하지만 그 사이사이에 사냥하는 모습, 제사장 및 무당의 모습, 가면 등의 인물 표현이 새겨졌다. 이들 형상은 뾰족한 도구를 이용하여 쪼아 낸 선으로 표현하였다.
특히 머리를 감싸고 기도를 올리는 제사장의 옆모습이나 크게 과장된 사지를 쫙 벌려 트랜스 상태로 들어간 모습을 강조한 여무당의 장면에서는 감정과 상황이 생생하게 표출되어 있다. 실루엣처럼 간략하게 묘사하였지만 그 전체의 표상에서 발산되는 형세의 표현에는 생명력이 넘친다.
또 하나 청동기시대의 인물 표현을 엿볼 수 있는 유물로 「농경문청동기」가 있다. 방패형 모양 청동기의 뒷면에는 농부가 따비질을 하고 무언가 파고 있으며 곡식을 항아리에 담는 장면이 표현되어 있다.
동작 위주의 표현을 한 인물은 선적이라고 할 만큼 골격만을 간략하고 추상적으로 묘사하였다. 하지만 생명력은 그대로 살아 있다. 암각화처럼 대체적으로 실루엣의 형상을 묘사하고 인물의 성기와 신체 내부를 그렸다.
고구려의 인물화는 고구려 고분 벽화에 나타난 인물 풍속도를 통해서 살펴볼 수 있다. 인물도는 묘 주인의 초상화 · 문지기도 · 행차도 · 수렵도 · 생활도 · 투기도 등 묘 주인의 생활과 관련 있는 주제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내용은 주인공이 선계로 올라가 생전에 누렸던 권세를 유지하고자 하는 소망을 표현한 것으로 추정된다. 벽화에서의 인물도는 4세기 중엽부터 5세기까지에 집중적으로 나타나며, 6세기 이후 주제가 사신도로 바뀌면서 벽면에서 사라지게 된다.
가장 이른 시기에 그려진 인물 풍속도 고분 벽화는 영화(永和) 13년(357년)의 묵서명(墨書銘)이 있는 「안악3호분(安岳三號墳)」이다. 이 고분에서 핵심적인 인물 풍속도는 묘 주인의 초상화와 그 부인의 초상화이다.
묘 주인상은 서측실 서벽에 정면으로 그려졌고, 그 부인상은 같은 서측실 남벽에 주인을 향한 모습으로 배치되었다. 장막 안에 주인공은 평상 위에 앉아 있고, 털 부채를 잡고 있다. 주인공의 짙은 눈썹과 팔자수염, 고양이 수염과 같은 턱수염의 표현 등은 위진(魏晉)시대 요동(遼東) 지방에서 유행한 묘 주인의 초상화 형식을 답습하고 있다.
묘 주인은 철선묘를 위주로 하면서도 굵고 거친 필선으로 옷주름을 강조하였다. 묘주 부인의 경우는 옷의 문양까지 표현하는 섬세한 표현을 구사하였다. 또한 지위의 높낮이에 따라 크기를 결정하는 고식(古式)의 크기 개념을 적용하여 주위에는 시종을 드는 인물들이 주인으로부터 멀어질수록 작게 그린 점도 특기할 만하다.
5세기에 접어들면서 인물도는 고구려적인 특색이 짙어지고 불교적인 소재가 증가하는 특징이 나타난다. 「덕흥리벽화고분」은 안악3호분과 유사한 형식을 갖추고 있으나 표현 양식에 있어서는 고구려화가 진행된 면모를 보이고 있다.
특히 이 무덤 벽화에서는 13인의 태수들이 묘 주인에게 하례를 하는 형식으로 묘 주인의 사회적 지위를 과시하고 있다. 이후 「약수리벽화고분」 · 「장천1호분」 · 「무용총」 · 「각저총」 · 「쌍영총」 등에서 인물도가 주류를 이루었다. 묘 주인의 초상에는 부부가 함께 나란히 그려진 경우가 많아진다.
그리고 수렵 장면 · 씨름 장면 · 전투 장면 · 놀이 장면 등 풍속의 내용이 풍부해진다. 더욱이 묘 주인이 스님과 대화를 나누거나 풍속 장면 사이에 연봉우리를 흩뿌린 것과 같은 불교적인 소재가 증가하는 특징이 보인다.
이 시기의 인물도의 복식이나 양식에 있어서 고구려적인 면모가 짙어지는 점이 주목된다. 점무늬 옷, 끝단이 주름무늬인 상의, 대님을 맨 바지, 절풍의 모자 등에서 고구려의 전형적인 복식이 나타난다. 그리고 인물의 다리 부분을 사선 방향으로 배치하여 움직임을 표현하는 점 등에서 고구려 특유의 양식을 엿볼 수 있다.
백제시대의 인물화로는 아좌태자(阿佐太子)가 그린 것으로 전하는 성덕태자상(聖德太子像)이 일본에 전한다. 이 「성덕태자급이왕자상(聖德太子及二王子像)」을 보면, 삼국시대의 전통, 발해식 복식의 착용, 당나라 인물화풍 등 복잡한 양상이 나타나 아직 면밀한 검토가 요구되는 작품이다.
신라시대의 인물화로는 천마총에서 출토된 관의 차양 도구에 그려진 「기마인물도」(국립경주박물관 소장)와 경주시 사정동 절터에서 수습된 「수렵문전」(국립경주박물관 소장)이 있다.
「기마인물도」는 창을 수평으로 들고 말을 타고 달리는 모습이다. 말은 사지를 들고 갈기와 꼬리를 휘날리며 달리고 있다. 인물과 말의 비례가 짤막하여 고졸한 느낌이 드나, 그것을 묘사한 필치에서는 생기를 느낄 수 있다.
굵은 필선으로 윤곽을 치고 그 가운데를 흰색과 붉은색으로 채색하였다. 갈라진 말발굽과 말 꼬리의 표현은 고구려 5세기 고분인 「덕흥리벽화고분」의 수렵 장면, 「무용총」의 수렵도와 유사하다.
「수렵문전」은 전(塼)에 새겨진 문양이지만, 당시의 회화적 경향을 살필 수 있는 자료이다. 이 전에는 양각의 선으로 말을 탄 기사가 화살 시위를 당기고 있고 사슴과 토끼가 혼비백산하여 도망가고 있는 장면이 표현되었다.
시위의 모습, 후방에 뒤를 돌아보며 도망치는 토끼의 모습, 사슴의 터럭을 몇 개의 짧은 사선으로 묘사한 방식 등은 중국 감숙성(甘肅省) 가욕관시(嘉峪關市) 신성(新城) 위진묘(魏晉墓)의 전돌에 그려진 그림과 유사하다.
이것으로 보아 「수렵문전」이 위진(魏晉, 221-418)시대 벽화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표현 양식에서 이전에 묘사된 양각의 선이 앞서 살펴본 「기마인물도」의 굵고 서예적인 필획과 달리 가늘고 균일하며, 특히 갈기를 선 하나하나로 표현한 점에서 수(隋) · 당(唐) 양식과의 연관성이 엿보인다.
통일신라시대에 제작된 회화로서 유일한 작품은 754년에서 755년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신라백지묵서 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110, 4450(국보 1979년 지정, 리암미술관 소장)이다. 이 변상도는 같은 표지 양면에 그려진 「불설법도」와 「신장상도」가 남아 있는데, 손상이 심하여 가운데 부분이 없어졌다.
「불설법도」는 2층의 목조 건물을 배경으로 사자들이 떠받치고 있는 연화대좌 위에 비로자나불이 앉아 있다. 그 왼쪽에는 보현보살이 부처를 향하고 있으며, 오른쪽에는 다른 보살들이 법문을 듣고 있다. 하늘의 구름 위에는 천녀가 묘사되어 있다.
불 · 보살상은 탄력감 있으면서도 유려한 철선묘(鐵線描)로 그리고, 건물은 자를 대고 그린 계화(界畫)로 표현하여 단정하면서도 세련된 느낌을 자아낸다.
금니의 선을 위주로 하되 부분적으로 먹선을 베풀었다. 비교적 완전한 모습을 살필 수 있는 보살의 모습을 보면, 아름다운 비례와 균형이 잡힌 몸매에 풍만하고 우아한 자태를 갖추고 있다. 대좌의 표현이나 보살의 자연스러운 배치를 보면 원근감이 나타나 있고, 대좌의 연꽃잎을 보면 간략한 표현이나 입체감이 물씬 풍긴다.
이 그림의 겉면에는 신장상이 보상화에 둘러싸인 채 버티고 서 있는 「신장상도」가 그려져 있다. 이 그림은 뒷면의 「불설법도」와는 반대로 먹선을 위주로 하되 금선을 간간히 사용하였다.
보상화에서는 전면 · 측면, 비스듬하게 거리감을 준 면 등 꽃의 방향이 다양하고 크기도 각각이어서 평면적인 문양에서 탈피한 회화적인 면모를 느낄 수 있다.
이 변상도는 652년에 제작된 중국 서안시(西安市) 대안탑(大雁塔) 문미석(門楣石)에 음각선으로 새겨진 「불설법도」와 문주(門柱)의 「호법신장상(護法神王像)」, 752년경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일본 나라시(奈良市) 동대사대불연화대좌(東大寺大佛蓮華臺座)의 음각선으로 새겨진 불설법도와 양식상으로 상통한다. 이러한 양식은 당나라에서부터 시작되어 한반도의 통일신라와 일본의 천평(天平)시대를 풍미하는 국제적인 면모를 보인 것이다.
발해시대의 인물화로서 대표적인 작품으로 「정효공주묘벽화」를 들 수 있다. 이 무덤은 전실봉토묘(磚室封土墓)로 직사각형의 벽돌로 잘 쌓은 다음, 회를 바르고 그 위에 벽화를 그렸다.
전실에는 무덤을 지키는 문발지기 2인이, 현실에는 시위(侍衛) · 시종 · 악사 · 내시(內侍) 등 10인의 인물상이 묘주를 빙 둘러 호위하고 있는 형식을 취하였다. 모두 직분에 따라 검 · 활 · 철퇴 · 악기 · 봇짐 · 활통 · 화살통 · 구리거울 등을 가지고 있다.
즉, 무사가 대문을 지키고 시위들이 철퇴와 검을 가지고 뜰을 지키며 노복들이 둘러서서 시중을 들며 악사들이 노래와 연주로 즐겁게 하는 모습이다. 인물은 풍만한 형상으로 철선묘로 윤곽을 그린 뒤 채색하였고, 옷에 꽃무늬까지 세세하게 표현하였다.
이 시기 문헌상으로 가장 많이 언급되는 화목은 초상화이다. 1031년(현종 22년) 중국의 제도를 본받아 궁궐 안에 경영전(景靈殿)이라는 진전(眞殿)을 짓고 임금의 초상을 봉안하였다. 그리고 궁궐 밖에는 사찰이나 능묘에 영전(影殿)을 설치하여 임금 및 왕비의 초상을 봉안하였다.
고려시대의 공신상 제도는 940년(태조 23년) 신흥사(新興寺)를 중수하고 공신당을 두고 동서 벽에 삼함공신을 그렸다는 『고려사』의 기록에서부터 찾아볼 수 있다. 이 공신상은 회화가 아닌 조각인 주상(鑄像)의 형태로 제작되기도 하였다. 삼태사사(三太師司)의 태조 및 개국 공신의 주상을 봉안하였다고 한다.
고려 후기부터는 사대부 초상을 제작하는 일이 성행하였다. 『동문선』을 비롯한 기록을 보면, 이제현상(李齊賢像) · 이색상(李穡像) · 안목상(安牧像) · 이규보상(李奎報像) · 박인석상(朴仁碩像) · 이첨상(李詹像) 등 당시 유명한 사대부의 초상화 제문이 전하고 있다.
고려 말 조선 초에는 정도전(鄭道傳)의 부인인 경숙택주진(慶淑宅主眞)까지 제작되었다. 이처럼 사대부 초상이 유행하게 된 이유는 성리학의 발달에 기인한 것으로 추정된다. 후손에 길이 전하여 철따라 제사를 지내며 경계의 대상으로 삼을 목적으로 제작된 것이다.
이와 더불어 당대 문인인 백거이(白居易)와 북송대 문인인 소식(蘇軾)의 초상이 사대부간에 유행하였다. 이들은 고려 후기 사대부들이 이상형으로 여길 만큼 숭상했던 문장가들이었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고려시대 초상화 가운데에는 「안향초상(安珦肖像)」이 대표작이라 할 만하다. 아무런 붓질도 하지 않은 배경에 가늘고 붉은 선으로 얼굴을 정의하고 가늘고 단단한 선으로 옷을 표현하여 배경으로부터 명료하게 구분되어 있다.
또한 공민왕이 그린 것으로 전하는 「염제신상(廉悌臣像)」(개인 소장)도 명료하고 간략한 표현이 특징이다. 특히 둥근 어깨의 선에서는 고려시대 매병의 어깨가 연상되고, 옷깃의 당초문(唐草文 : 덩굴무늬)은 이 시기 나전 칠기의 문양과 닮았다.
초상화 다음으로는 고사 인물화에 대한 기록이 많이 보인다. 이 당시 고사 인물화는 내용상으로 볼 때 크게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중국의 고사를 그대로 그린 것이다. 송나라 사마광의 고사를 그린 사마공격옹도(司馬公擊瓮圖), 『시경(詩經)』의 무일편(無逸編)의 내용을 그린 무일도(無逸圖) 등이 기록상에서 확인된다.
다른 하나는 중국의 고사를 본떠서 우리의 상황에 맞게 변용한 것이다. 당나라 낙중구로회(洛中九老會)와 송나라 진솔회(眞率會)를 본떠서 최당(崔讜) · 이준창(李俊昌) 등이 조직한 기로회를 그린 「해동기로회도(海東耆老會圖)」와, 「노자기우도(老子騎牛圖)」에서 노자 대신 최당을 대입하여 그린 「태위공기우도(太尉公騎牛圖)」 등이 그러한 예이다.
도석 인물화로는 넓은 의미의 도석 인물화, 즉 예배용의 불화는 무신 집권 시대 이후의 작품이 100여 점이 넘게 남아 있어 풍부하게 그 실상을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좁은 의미인 수묵화로만 한정하여 볼 때 한국 · 일본 · 미국 등지에 소장된 「오백나한도」가 유일하다.
「오백나한도」는 바위나 의자 위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화면 가득히 배치하고 시종을 드는 비구 스님을 작은 크기로 그렸다. 몸은 백묘법으로 필선만 사용하였지만, 옷에는 옅은 채색을 넣었다.
또한 옷은 약간의 억양이 들어간 정두서미묘(釘頭鼠尾描)로 그리고, 얼굴 및 몸의 필선은 옷선보다 약간 가는 선을 사용하였다. 그림에 따라 변화를 구사한 것도 있다.
고려시대 회화는 대체로 고고유사묘(高古遊絲描)나 정두서미묘가 주종을 이룬다. 노영(魯英)이 1307년에 그린 「아미타내영도」와 「지장보살도」에는 매우 개성적인 묘법이 구사되었다. 불상의 얼굴은 길쭉하게 그렸고, 옷주름은 행운유수묘(行雲流水描)를 반복적으로 패턴화시켜 표현하였다.
고려시대 풍속화로 남아 있는 작품은 공민왕(恭愍王)이 그린 것으로 전하는 「음산대렵도(陰山大獵圖)」(국립중앙박물관 소장)와 이제현(李齊賢)이 그린 것으로 전하는 「기마도강도(騎馬渡江圖)」(국립중앙박물관 소장)가 있다.
「수렵도」는 원래 두루마리 그림이었던 것이 누군가에 의하여 여러 조각으로 나뉘어졌다. 그 가운데 세 조각이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호복(胡服)의 복장에 변발(辮髮)을 한 인물이 말을 타고 달리거나 활시위을 당기는 모습이 표현되어 있다. 필치가 매우 세밀하고 채색은 인물 · 말 · 산 등 대상에만 베풀어 선명하게 강조하였다.
「기마도강도」는 남송(南宋) 마하파(馬夏派)의 구도로 겨울철 사냥 중에 강을 건너는 장면을 담았다. 이 그림 역시 섬세한 필치로 묘사되었다.
이전의 시대에 비하여 남아 있는 작품과 기록이 풍부하여 그 전개 양상을 비교적 자세히 살필 수 있다.
고려 후기의 전통이 지속되면서 새로운 화풍을 모색하는 양상을 보였다. 산수 인물화에서는 고려 후기 이후의 남송대 마하파 화풍이 유행하였다. 이상좌(李上佐)의 「송하보월도(松下步月圖)」는 마하파 화풍의 전형을 보여 준다. 대각선 구도에 각이 진 타지법(拖枝法)의 나무 표현에서 전형적인 마하파 화풍을 엿볼 수 있다.
이 뿐만 아니라 절파 화풍의 작품도 보인다. 강희안(姜熙顔)의 「고사관수도(高士觀水圖)」(국립중앙박물관 소장)가 그러한 예이다. 이는 화면 오른쪽 절벽을 배경으로 고사가 물을 관조하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마하파의 대각선 구도가 아닌 경물이 수직 방향으로 화면의 반쪽에 치우쳐 배치되는 편파 구도이고 바위를 거칠고 분방한 부벽준(斧劈皴)으로 질감을 표현한 점에서 절파 화풍을 감지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화풍은 명대 절파의 장로(張路, 1464-1537)의 화풍과 연관이 깊다. 그런데 강희안은 장로보다 47년 정도 앞서 태어났다. 이 점 때문에 진위가 의심받아 왔다. 최근에는 원대 전절파(前浙派) 화풍을 계승한 것으로 해석하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또한 이 그림에서는 고려시대 인물화와 달리 옷선의 묘법을 굵게 하여 인물의 성격을 보다 뚜렷하게 부각시켰다. 산수화의 점경 인물이지만 인물화의 뛰어난 솜씨를 발휘한 작품으로 안견(安堅)의 작품으로 전칭되는 「적벽도(赤壁圖)」(국립중앙박물관 소장)가 있다.
굴곡과 비수(肥瘦 : 살찌고 여윔)의 변화가 심한 감람묘(橄欖描)와 정두서미묘를 혼용하여 인물을 개성 있게 표현하였다. 이러한 기법은 구불구불하고 변화가 심한 산수 배경의 준법과 상통하는 것이다.
이 시기 공신도상의 전형을 보여 주는 작품으로 「장말손영정(張末孫影禎)」을 들 수 있다. 사대부의 기상을 강조한 듯 옷선을 각이 지게 묘사하였고, 허리 부분은 팔걸이에 의하여 홀쭉하게 들어간 형상으로 표현하였다.
각진 옷선에다 바탕을 여백으로 처리하여 인물이 배경으로부터 명료하게 구분되는 고려시대 초상화의 양식을 보여 주고 있다.
얼굴은 갈색의 선으로 골격과 주름을 묘사한 뒤 그 주위에 약간의 음영을 넣어 입체감을 표현하였다. 이처럼 격식을 갖춘 공신도상은 16세기의 「이현보영정(李賢輔影禎)」과 화풍상으로 매우 대조적이다.
「이현보영정」는 화승인 옥준상인(玉峻上人)이 그린 것이다. 경상 앞에 불자를 잡고 앉아 있는 형식을 비롯하여 화려한 색채와 옷주름의 표현 등이 스님의 진영을 그리는 표현 방식을 사용하였다. 더구나 이현보의 자유롭고 강한 성품을 부각시키기 위하여 사실적인 묘사보다는 강조와 생략에 의한 변형이 이루어진 것 같다.
「장말손영정」과 「이현보영정」은 작가가 각기 화원과 화승으로 달라 표현 기법에서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아울러 전자는 격식과 위엄을 갖추어 다소 형식적이라고 한다면, 후자는 자유로운 면모에 강한 개성이 표현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시기에는 절파식(浙派式) 산수 인물화의 유행이 돋보인다. 그리고 조선통신사 화원을 중심으로 선종화가 제작되고, 기로회도에 기로도상의 형식이 나타난다. 산수 인물화는 고려 말부터 발전한 화목이다.
고려 말 조선 초에는 마하파의 화풍이 주류를 형성하였다면, 조선 중기에서는 명대 절파 화풍이 수용되어 발전하였다. 산수 인물화 가운데서도 소경 인물화가 증가하는 추세를 보인다.
이경윤(李慶胤)의 그림으로 전칭되는 「고사탁족도(高士濯足圖)」(고려대학교박물관 소장)가 이 시기 산수 인물화의 전형을 보여 주는 작품이라 하겠다. 점점이 떠 있는 듯이 배치된 바위 위에 걸터앉아 세상의 더러운 때를 씻고 있다. 옷선을 정두서미묘로 그리고 죽엽묘(竹葉描)로 동정과 소매 깃을 마감하여 정연하면서도 강한 인상을 풍긴다.
이숭효(李崇孝)의 「어부도(漁夫圖)」(국립중앙박물관 소장)에서는 고기를 낚으며 자연에 흠뻑 젖은 낚시꾼의 발걸음은 즐거운 듯 경쾌한 모습이다. 빠른 필치로 인물과 배경을 능란하게 표현하였다. 배경도 역시 인물의 표현과 같이 경쾌한 붓질로 이루어져 흥이 깃들어져 있다.
이처럼 16 · 17세기의 산수 인물화는 표현성이 강하다. 이명욱(李明郁)의 「어초문답도(漁樵問答圖)」(간송미술관 소장)에서 그 절정을 이룬다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은 북송대 문인 소식(蘇軾)의 「어초한화(漁樵閑話)」의 내용을 그린 고사 인물화이다.
촘촘하게 묘사한 갈대를 배경으로 얼굴은 초상화법으로 사실적으로 묘사한 반면, 옷주름은 중묵(重墨)으로 각이 지고 변화가 심한 정두서미묘를 사용하여 등장 인물의 성격이 강하게 느껴진다.
앞의 간일한 표현의 산수 인물화와는 다른, 충실하고도 중량감을 느끼게 하여 준다. 사실적 묘사보다는 표현성이 강한 묘법을 사용한 것이 이 시기 산수 인물화의 특징이라 하겠다.
표현성이 강한 묘법의 사용은 초상화에서도 나타난다. 「이항복상(李恒福像)」(서울대학교박물관 소장)을 보면, 얼굴의 표현에 있어서는 흰 수염은 물론 얼굴의 반점까지 자세히 그렸다.
반면, 옷주름의 표현을 보면, 이 당시 산수 인물화에서 즐겨 쓰던 정두서미묘를 모두 8번 긋는 정도로 간략하게 묘사한 것이다. 사실적으로 묘사한 얼굴과 간일하고 추상적으로 표현한 옷의 대비가, 이 시기 인물화에서 볼 수 있는 독특한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이 시기에는 중국의 고사가 아닌 한국의 고사를 다룬 작품도 등장한다. 청록 산수화 기법으로 다채롭게 표현된 조속(趙涑)의 「금궤도(金櫃圖)」(국립중앙박물관 소장)가 그 예이다.
이 그림은 신라 경순왕이 고려에 쉽게 나라를 내준 것처럼 정치에 게을리 하면 나라를 잃게 된다는 교훈을 『삼국사기』에서 찾은 고사 인물화이다. 내용 자체가 한국의 것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이 시기에는 화원들에 의한 선종화의 제작이 눈에 띈다. 특히 이 시기의 선종화는 김명국(金明國) · 한시각(韓時覺) 등 일본에 조선통신사의 일행으로 다녀왔던 화가들의 작품이 전하는 점으로 보아, 당시 일본인의 취향에 맞추어 그려진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김명국의 「달마도(達磨圖)」(국립중앙박물관 소장)는 근심 어린 눈초리에 착잡함에 입을 굳게 다문 모습이 고통스런 삶의 한 단면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고통이 큰 깨달음이라는 역설을 어떤 형식에 구애되지 않고 힘찬 옷선의 붓질로 나타내었다.
이 시기에는 풍속화가 유행하면서 통속 세계가 발달하고, 사실주의적 기법이 성행하며, 조선적인 특성이 뚜렷해진다. 그리고 표현 기법이 다양해지는 양상이 나타났다.
이 시기에는 아취 세계와 통속 세계를 엄격히 구분하고 후자를 차별하는 풍조에 대한 반발과 도전이 일어난다. 그것은 바로 풍속화를 중심으로 형성된 통속화 경향이다.
이러한 경향은 그동안 무시받았던 하층민의 생활상과 그것을 대변하는 통속 세계의 가치를 널리 인식시키는 것을 가리킨다. 그 이면에는 신분 구분의 부당성을 폭로하고 하층민의 삶을 옹호하는 이데올로기가 깔려 있다.
신윤복 풍속화의 주제를 보면, 단지 탈춤에 나타난 주제인 처첩간의 갈등, 승녀와 부녀자간의 불륜 관계, 양반과 상인의 신분 갈등 등 당시 사회 문제가 그대로 노출되어 있다. 이것은 풍속화에 사회적 사실주의의 성격이 내포되어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18세기 풍속화는 윤두서(尹斗緖)와 조영석(趙榮祏) 등 사대부 화가에 의하여 주도되었다. 풍속화는 처음에 하층민 생활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노동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는 수준에서 출발하였다.
윤두서는 16 · 17세기 산수 인물화에서 점차적으로 풍속화의 새로운 형식을 모색하였다. 절파 화풍의 산수 인물에서 등장 인물만 고사에서 농부나 일꾼으로 대체하는 정도에서 시작하였다. 이러한 노력은 조영석에 와서 어느 정도 결실을 맺게 된다.
그는 조선 중기의 전통적인 공간 개념에서 탈피하여 풍속화에 걸맞는 공간을 창출한 것이다. 그도 역시 초기에는 중국의 풍속화나 화보를 본뜬 풍속화를 간간이 제작하였다.
그러나 후반에 와서는 당시 조선의 서민에 걸맞는 화풍을 창안하는 등 적극적으로 풍속화의 진흥에 힘썼다. 「절구질」(간송미술관 소장)을 보면 서민들과 눈높이를 맞춘 수평 시점을 적용하여 서민들에게 다가가고 있다. 그리고 복선의 묘법으로 서민의 옷 질감을 사실적으로 나타내었다.
사대부 화가들의 선구자적인 노력은 18세기 후반 직업 화가인 화원들에 와서 비로소 그 결실을 맺게 된다. 화원은 신분의 성격상 사대부 화가에 비하여 표현의 제약이 적어지고 무엇보다도 백성의 정서적 색채를 짙게 표현하는 데 유리하였다.
통속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 속에서 오랫동안 봉건적인 이데올로기에 억눌려 왔던 감정과 색정 등의 본능이 점차 활발하고 거리낌 없이 표출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된 것이다. 여기에 김홍도(金弘道) · 김득신(金得臣) · 신윤복(申潤福) 등 당시 기라성 같은 화원들이 대거 참여함으로써 조선 후기 풍속화는 절정으로 치닫게 된다.
김홍도는 풍속화에서 서민의 희로애락을 은유와 풍자로서 엮어 내어 생명감 넘치는 세계를 보여 주었다. 「타작」(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을 보면, 단순 경직 표현을 넘어선 칼날 같은 풍자가 돋보인다. 웃음을 함빡 머금고 열심히 일하는 일꾼들의 모습과 웃음과 마름의 흐트러진 자세를 통해서 계급간의 불공평한 관계를 극화시켜 표현하였다.
김홍도의 뒤를 이어 화원으로서 맹활약을 한 풍속화가로는 김득신을 꼽을 수 있다. 그는 김홍도의 아류라고 평가받을 만큼 그의 화풍을 충실히 계승하였다. 하지만 그래도 돌발적인 상황 묘사나 인물의 성격 묘사에 남다른 재능을 발휘하였다.
그런 가운데 화원들은 점차 경직 · 놀이 등의 건전한 생활상뿐만 아니라 사회의 부정적이고 어두운 부면의 제재까지 다루게 된다. 김후신(金厚臣)이 당시 심각한 사회 문제로 여러 차례 영조가 금주령까지 내려 국가적인 차원에서 재제가 이루어진 음주 장면을 주제로 삼은 것이 그러한 예이다.
이러한 추세에 힘입어 신윤복은 기방(妓房)의 풍속과 같은 남녀의 성정(性情)을 화폭에 과감하게 담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는 당시 도화서에서 쫓겨났다고 전해질 만큼 윤리상으로는 하자가 있지만, 주제의 제약을 탈피하는 단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정(情)에 상응하는 화풍을 정립하였다.
그의 풍속화는 본연의 감성에 근거를 두고 표출한 것이기에 더욱 생동감 있는 감각과 풍부한 조형성을 느낄 수 있다. 또한 그는 시선 구조를 적극 활용하여 등장 인물을 긴밀하게 연결하였다. 그리고 아웃사이더를 설정하여 극적인 흥미를 돋우는 등 독특한 설화적 구성을 즐겨 사용하였다.
원래 사실성을 생명으로 하는 초상화에서도 한층 사실주의적인 양식이 강화되었다. 필선으로 골상을 표현하고 미세한 바림질로 음영을 보완하는 16 · 17세기의 선적인 묘사에서 무수한 잔 붓질과 짙은 채색으로 볼록하게 표현하는 훈염법(暈染法)으로 바뀐다.
또한 조선 초 · 중기에 고정된 좌안7분면의 취세에서 정면상을 비롯한 7 · 8 · 9분면 등 취세에 자유로움을 가져 왔다. 훈염법을 사용한 이른 예로써 윤두서의 「자화상」(해남 윤영선 소장)을 들 수 있다.
이 작품은 대담하게 몸체를 생략하고 얼굴만을 화면 가득히 담았다. 그리고 가는 필선으로 얼굴의 입체감을 표현하고 세밀한 붓질로 수염을 하나하나 묘사하였다.
이러한 사실주의적인 기법은 얼굴 뿐만 아니라 점차 옷의 표현에까지 확대되어 나간다. 옷주름도 직선이 아니고 갈고리 모양으로 흰 선으로 주름을 표현하고 그 주변에 음영을 넣어 입체감을 표현하였다.
조영석이 자신의 형의 초상을 그린 「조영복초상(趙榮福肖像)」(경기도박물관 소장)은 개성이 물씬 풍기는 옷의 묘법과 연거복에 걸맞는 자유로운 표현이 매력이다.
옷의 외곽을 펑퍼짐하게 정의하고 그 안을 날카롭게 뻗친 옷주름에서 기교를 뛰어넘는 아취를 느낄 수 있다. 여기에 매듭이 굵은 양손과 가슴에 홍세조를 매고 거기에 매단 부채가 이루는 선의 흐름은 매우 자연스럽다.
이명기(李命基)가 그린 「오재순초상(吳載純肖像)」(삼성미술관 리움소장)은 정면관(正面觀 : 앞에서 바라본 모습)의 위엄 있는 형상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18세기 초상화의 대표작이다.
얼굴은 터럭보다도 더 가는 선을 겹쳐 입체감을 내었다. 옷주름은 이전보다 복잡해졌는데, 직선 위주에서 갈고리진 곡선의 옷주름이 그려지고 선 주변에 음영을 넣었다.
18세기에는 역시 다른 장르와 마찬가지로 소재나 화풍상으로 조선화된 양상이 곳곳에 드러난다. 특히 중국의 고사 인물화를 조선식으로 번안한 작품이 제작되는 경우가 빈번해진다.
대표적인 예로 북송(北宋)을 개국한 태조(太祖)조광윤(趙匡胤)이 눈 내리는 밤에 심복의 신하인 조진(趙普)의 집을 방문하여 태원(太原) 문제를 논했다는 고사를 자신의 모습으로 바꾼 조영석의 「설중방우도(雪中訪友圖)」, 중장통(仲長統)의 「낙지론(樂志論)」을 조선화하여 그린 김홍도의 「삼공불환도(三公不還圖)」, 북송대 소식이 만취한 채로 말을 타고 돌아온 내용을 번안한 「지장기마도(知章騎馬圖)」 등을 들 수 있다.
정홍래(鄭弘來)의 「산수인물」처럼 중국식의 고사(高士) 대신에 갓 쓴 선비가 등장하기도 한다. 또한 정선(鄭敾)의 「독서여가(讀書餘暇)」 · 「인곡유거(仁谷幽居)」, 김홍도의 「단원도(檀園圖)」 · 「마상청앵(馬上聽鶯)」 · 「포의풍류(布衣風流)」 등 화가 자신의 생활상을 표현한 작품도 증가하였다.
또한 이 시기의 인물화는 그 표현 기법에 있어서도 다양한 양상이 나타난다. 인물화의 중심적인 요소라 할 수 있는 묘법을 보면, 이전에 철선묘 · 고고유사묘 · 정두서미묘 · 절로묘(折蘆描) · 죽엽묘 등 몇 가지 묘법으로 한정되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와서는 이들 묘법에 덧붙여 감람묘 · 유엽묘(柳葉描) · 혼묘(混描) · 전필수문묘(戰筆水紋描) · 궐두묘(橛頭描) 등 각종 묘법이 활용된다.
특히 도석 인물화에서 다양한 묘법의 활용이 두드러진다. 고려 후기 불화에서 여러 가지 묘법이 구사된 이후 18세기에 다시 좁은 의미의 도석 인물화에서 크게 발달한 것이다.
윤두서의 「노승도(老僧圖)」(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인상(李麟祥)의 「검선도(劍僊圖)」(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김홍도의 「선승염불도(仙僧念佛圖)」 · 「남해관음도(南海觀音圖)」(이상 간송미술관 소장) 등은 묘법의 활용이 매우 개성적이면서도 기법을 뛰어넘어 깊이 있는 내면세계를 표현한 명품들이라 하겠다.
「노승도」에서는 세월의 풍상을 겪으면서 인생을 달관하는 여유가 비치는 얼굴에서만 사실적 묘사가 돋보인다. 그리고 옷주름은 절로묘를 사용하여 16 · 17세기에 유행한 대비적 효과를 사용하였다는 점에서 전통적인 성향이 강한 작품이라 하겠다.
이와는 달리 이인상의 「검선도」에서는 가늘면서도 꼿꼿한 필선으로 전체를 통일시키고 있다. 날카로운 눈매와 무표정한 얼굴에서는 섬뜩한 느낌이 들 정도로 차가운 분위기가 맴돌고 있다.
한편으로는 온화하고 부드러우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차갑고 강한 양면성을 보인 작품이다. 이 그림은 격조 높은 문인화풍으로 그린 도석 인물화라는 점에서 주목되고 있다.
바다 위에 동자를 거닐고 떠 있는 관음보살을 그린 「남해관음도」는 선의 율동감이 절묘하고 아름다운 작품이다. 남해관음은 바다의 들끓는 듯한 파도가 그대로 올라온 파도 옷을 입고 있는 셈이다.
또 하나 묘품인 「염불서승도」는 구름 위에 피어난 연꽃 위에 결가부좌한 선승이 염불왕생을 하는 장면을 묘사한 것으로 생각된다. 부글부글 끓는 듯한 연화대좌 속에서도 두광처럼 달빛 속에 빛나는 스님의 뒷모습에서는 초탈함이 엿보인다. 그리고 달빛이 반사되어 비치는 장삼에서는 달밤의 정취마저 느낄 수 있다.
이 시기 인물화에서 두드러진 특징으로는 18세기 김홍도식의 인물화풍이 유행하고, 도석 인물화가 발달하며, 인물화는 서민에까지 저변화되면서, 부분적으로 서양화법의 영향이 뚜렷해진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김홍도식의 인물화로는 유숙(劉淑)의 「수계도(修禊圖)」를 들 수 있다. 이 작품은 1853년 중국의 난정(蘭亭) 모임의 1500년 되는 해를 기념하여 만든 난정수계도(蘭亭修禊圖)이다. 그림에 시 30수를 덧붙여 만든 두루마리 그림으로 8m에 이르는 대작이다.
좌우를 막은 배경 속에 참석자들의 다양한 모습을 그렸는데, 인물은 초상화 기법으로 사실적으로 그렸다. 그런데 이 수계도의 구성은 김홍도의 「서원아집도」를 연상케 하며 인물 표현도 김홍도식이다.
도석인물화는 청대의 화풍이 전래되는 것으로 보인다. 청대 양주팔괴(楊州八怪)와 해상파(海上派)의 인물화 도상이 전래되어 장승업(張承業)을 중심으로 도석 인물화에 그 영향을 미친다. 그리하여 이전의 김홍도 화풍에서 장승업의 화풍으로 바뀌게 된다. 장승업 인물화의 대표작으로는 「삼인문년도(三人問年圖)」(간송미술관 소장)를 들 수 있다.
배경은 전통적으로 애용된 명료한 선적인 표현에서 과장된 윤곽선에 입체감이 충실한 표현으로 바뀌었고, 인물 역시 구불기가 있는 선으로 흐드러지게 표현하였다.
다음으로 서양화법의 영향이 증대되었다. 서양화풍은 크게 원근법과 음영법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궁정 행사도에는 서양화의 원근법이 적용되고, 풍속화 및 초상화에는 입체감을 살린 음영법이 활용되었다.
신광현(申光絢)의 「초구(招狗)」(국립중앙박물관 소장)를 보면, 인물 · 건물 · 나무 등에 음영을 넣었을 뿐만 아니라 그림자까지 표현하여 서양화의 음영법에 대한 정확한 구사를 보여 주고 있다.
이재관(李在寬)이 그린 「약산진영(若山眞影)」(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을 보면, 부드럽고 정교하면서도 사실적인 얼굴의 표현과 강한 필세가 살아 꿈틀거리는 옷의 표현이 대비를 이루고 있다.
얼굴에는 서양화법의 영향이 짙고, 옷주름은 전통 화법에 충실하게 묘사되었다. 서양화적인 요소가 전통 화법의 틀 속에서 미묘하게 수용된 것이다.
점차 서양화적인 요소가 강해지면서 채용신(蔡龍臣)이 그린 초상화들에서는 얼굴 표현뿐만 아니라 옷주름에서도 적극적으로 서양화법을 도입하는 변화가 일어났다.
그런데 존 번얀(John Bunyan)의 The Pilgrim's progress를 제임스 게일(James Gale, 한국명 奇一)이 번역하고 김준근(金俊根)이 삽화를 그린 『텬로력뎡』의 경우, 등장 인물이나 배경은 조선식으로 고쳤다.
그러나 그 기본적인 구성이나 구도는 서양화풍을 따른 것도 있다. 그리고 이러한 외래적인 영향과 더불어 민화가 발달한다. 민화 가운데 인물화의 경우는 풍속화 및 고사 인물화 등이 주로 그려졌다.
인물화는 인간을 그리는, 인간과 가장 밀착된 장르이기 때문에 표현 방식이나 표현 매체가 달라질 망정 오늘날에도 꾸준히 제작되고 있다. 그리고 앞으로도 우리와 생존을 같이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