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직지(直之), 호는 귀산(歸山). 윤상(尹祥)의 문인이다.
1416년(태종 16) 친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 1435년(세종 17)에 종학박사(宗學博士)에 제수되었다.
1439년 눈병으로 사직하자 종친인 경녕군(敬寧君) 이비(李礻+非) 등 19인이 상소해 한관(閒官)에 서용되었다. 1446년 사성으로 있으면서 종학 교수들이 다른 직책을 겸하는 폐단을 시정하기 위해 소를 올렸다. 1448년에는 상주목사로 나갔다가 판종부시사(判宗簿寺事)로 내직에 임명되어 사서언해(四書諺解)의 번역을 담당하였다.
그 해에 불당의 설립을 반대하는 소를 올렸고, 후에 사간이 되었으나, 당성군(唐城君) 홍해(洪海)의 아들의 고신에 서명하지 않았다 해서 좌천되었다. 1450년(문종 즉위년) 집현전 부제학(集賢殿副提學)에 제수되고, 1454년(단종 2)에 예문제학이 되었다. 그 해에 다시 내불당(內佛堂)의 혁파를 건의하는 소를 올렸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1455년(세조 1)에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에 제수되었으며, 1458년 이승소(李承召)와 함께 최선복(崔善復) 등 12인을 거느리고 『초학자회(初學字會)』를 우리말로 번역하였다. 1459년에는 군기부정(軍器副正) 김석제(金石梯)와 함께 새로운 진법(陣法)을 의논하였다.
1461년 최항(崔恒)·정인지(鄭麟趾) 등 9인과 함께 『손자주해(孫子註解)』를 바르게 고쳐 정리하는 등 한문 국역에 공이 컸다. 1462년 아산현을 회복하고자 도모하다가 사헌부의 탄핵으로 고신(告身)이 삭탈되었다. 죽은 후 성균생원 이극소(李克紹) 등의 상언(上言)으로 관직과 과전을 돌려받았다.
김말(金末)·김반(金泮)과 함께 경사(經史)에 널리 통하고, 특히 성리학에 정통하였다. 이들 세 사람은 당시 성균관에서 후진에 전념해 학문 발전에 큰 성과가 있어, ‘삼김(三金)’·‘경학삼김(經學三金)’ 혹은 ‘관중삼김(館中三金)’이라 불렸으며, 많은 명사를 배출하였다. 시호는 문장(文長)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