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진보 ()

고문진보
고문진보
한문학
문헌
송나라 말기의 학자, 황견이 전국 시대부터 송나라까지의 고시와 산문 등을 모아 엮은 시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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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고문진보』는 송나라 말기의 학자 황견이 전국시대부터 송나라 말기까지의 고시와 산문 등을 모아 엮은 시문집이다. 전집은 「권학문」을 비롯한 고시를 주로 수록하였고, 후집은 17가 형식의 산문을 실었다. 『고문진보』는 1420년(세종 2)에 『선본대자제유전해』라는 명칭으로 옥천에서 간행되었다. 1452년(문종 2)에는 『상설고문진보대전』이라는 명칭으로 간행되었다. 이후 간행을 거듭하여 널리 유포되었다. 『고문진보』는 고려 말에 수입된 이래 고문의 문체를 익히기 위한 아동용 교과서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목차
정의
송나라 말기의 학자, 황견이 전국 시대부터 송나라까지의 고시와 산문 등을 모아 엮은 시문집.
서지적 사항

20권 10책.

내용

이 책은 전국시대부터 송나라에 이르기까지의 시문을 전집 · 후집으로 나누어 수록하였다. 전집은 「권학문(勸學文)」을 비롯하여 소박하고 고아한 고시를 주로 수록하였고, 후집은 산문인 17체의 명문을 실었다.

전집 10권은 권1 · 2에 오언고풍단편, 권3에 오언고풍장편, 권4 · 5에 칠언고풍단편, 권6에 칠언고풍장편, 권7에 장단구, 권8에 가류(歌類), 권9에 행류(行類), 권10에 음(吟) · 인(引) · 곡류(曲類)로 구성되었다.

후집 10권은 권1에 사(辭) · 부류(賦類), 권2에 설(說) · 해류(解類), 권3에 서류(序類), 권4에 기류(記類), 권5에 잠(箴) · 명류(銘類), 권6에 송(頌) · 전류(傳類), 권7에 비(碑) · 변류(辨類), 권8에 표류(表類), 권9에 원(原) · 논류(論類), 권10에 서류(書類)로 이루어져 있다.

『고문진보』가 우리나라에 유입된 경위는 자세하지 않다. 고려 말엽의 문신 전녹생(田祿生)이 중국에서 『고문진보』를 사가지고 와서 산증(刪增)을 가하여 처음으로 합포(合浦)에서 간행하였다는 기록이 『야은일고(野隱逸稿)』에 있다. 이것을 근거로 추정하면, 이미 14세기에 『고문진보』가 들어와 있음을 알 수 있다.

『고문진보』는 1420년(세종 2)에 『선본대자제유전해(善本大字諸儒箋解)』라는 명칭으로 옥천에서 간행되었다. 1452년(문종 2)에는 『상설고문진보대전(詳說古文眞寶大全)』이라는 명칭으로 동활자인 경오자로 간행되었다. 그 뒤로 중간을 거듭하여 이 대본이 널리 유포되고 사용되었다. 그리고 언해본 · 현토본이 간행되어 현재까지 전한다.

『고문진보』는 고려 말에 수입된 이래 조선시대 서당에서 고문의 연변(演變)과 체법(體法)을 익히기 위한 아동용교과서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유몽인(柳夢寅)『어우야담(於于野談)』에서는 “우리나라에서 어린이들의 배움은 대개 『십구사략』 · 『고문진보』를 익히는 것으로 학문에 들어서는 문으로 삼았다.”라고 기록되었다. 허균(許筠)『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성옹지소록하(惺翁識小錄下)」에서는 “국초의 제공이 모두 『고문진보』 전후집을 읽어 문장을 지었으므로, 지금의 인사들이 처음 배울 때 이것을 중요하게 여긴다.”라고 언급하였다.

김륭(金隆)『물암집(勿巖集)』에 보이는 「고문진보전후집강록(古文眞寶前後集講錄)」, 정사신(鄭士信)『매창집(梅窓集)』에 보이는 「고문진보전후집주석정오(古文眞寶前後集註釋正誤)」 등의 자료는 『고문진보』가 중요한 교과서였음을 명백히 보여준다.

그러나 유몽인은 윗글에 이어 “내가 세 번이나 중국에 갔으나, 이른바 『고문진보』 · 『십팔사략』은 중국에서 매우 드물었다.”라고 하였고, 허균 또한 “그러나 『고문진보』는 한 사람이 우연히 모아놓은 것이라서 그 취사가 확실하지 않으니 읽지 않는 것이 좋다.”라고 하거나 “ 권필(權韠)이안눌(李安訥)은 『고문진보』를 읽지 않았지만 그 시는 좋다.”라고 하여 『고문진보』에 대해 비판적 자세를 견지하였다.

조위한(趙緯韓)은 허균의 『성소부부고』에서 “중국 사람이 우리나라 사람들의 글이 중국과 대등하게 됨을 꺼려하였다. 그래서 『십팔사략』과 『고문진보』 두 책을 지어 우리나라에 보냈다. 그런데 이 책이 온 뒤에 우리나라의 문장이 누추해져서 옛 것에 미치지 못하였다”고 비판하였다. 『오산설림(五山說林)』에서도 이백(李白)이 한형주(韓荊州)에게 올린 글의 ‘청평(靑萍)’ · ‘결록(結綠)’에 대한 『고문진보』의 주가 잘못되어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고문진보』에 대한 비판은 조선 후기에 일반화된 현상인 것 같다.

『고문진보』는 새로 간행되는 과정에서 산증이 가해져서 부피와 체재 면에서 약간의 변모가 일어났다. 첫째, 부피는 중국이나 일본에 많이 알려진 병오본(1366)은 시 217수, 문 67편이고, 홍치본(弘治本, 1502)은 시 245수, 문 67편이다. 우리나라의 『상설고문진보』는 시 240수, 문 131편이다.

둘째, 체재는 후집에 국한된 것이지만, 지정 · 홍치본은 공히 문형별로 편찬되었고 『상설고문진보』는 역대순으로 편집되었다.

이상의 두 가지 사실로 미루어 보면 우리나라는 시보다는 산문을, 문체보다는 역대로 연변한 문장의 품격을 독자에게 개괄적으로 이해시키는 데 주안점을 두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이 책이 당송팔가(唐宋八家)의 문장을 주축으로 한 것은 사실이지만, 책의 성격에 있어서는 『당송팔가문』과 달리하고 있는 것이 특색이다.

『당송팔가문』에서는 이른바 ‘고문체’만을 수록하였는데, 『고문진보』에서는 고문체와는 정반대라고 할 수 있는 「북산이문(北山移文)」과 「등왕각서(滕王閣序)」와 같은 변려문을 수록하였고, 「이소경(離騷經)」과 같은 초사도 실었다.

그리고 전집에서는 시가를 고문이라는 표제 아래에 실었다. 이상을 종합하면 이 책의 책명에 보이는 ‘고문’은 문체의 이름이라기보다는 ‘고대의 글’이라는 뜻이 강하다.

『고문진보』는 중국인에 의하여 중국인의 글을 모은 것이라는 한계성으로 인하여 비판적 견해가 있다. 그러나 변문을 억제하고 고문을 숭상하던 기조에 편승하여 초학들이 널리 익힌 도서의 하나였다.

그리고 우리에게 알맞게 산증되었다는 점과 이 책에 대한 각종 주석, 그리고 언해본 · 현토본 등이 있었다는 사실로 미루어 조선시대 문장학의 학습용 도서로서 폭넓게 수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야은일고(野隱逸稿)』
『어우야담(於于野譚)』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오산설림(五山說林)』
관련 미디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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