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주조시기는 자세하지 않으나, 김석주가 편저한 ≪행군수지 行軍須知≫의 자서(自序)에 의하여 1679년(숙종 5) 이전에 이미 이 활자가 만들어져 사용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증보문헌비고≫에도 “숙종 초에 청성부원군(淸城府院君)김석주가 한구를 시켜 소자(小字)를 쓰게 하고 동(銅)으로 주조하여 강목을 인출하니 이른바 ‘소자강목자’이다.”라고 하여 한구가 쓴 것임을 밝히고 있으나, 그 주조시기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일본인 학자 마에마(前間恭作)는 김석주의 할아버지인 김육(金堉)의 ≪잠곡집 潛谷集≫, 외숙 신최(申最)의 ≪춘소자집 春沼子集≫, 신정의 아버지인 신익성(申翊聖)의 ≪낙전당집 樂全堂集≫, 익성의 아우 익전(翊全)의 ≪동강집 東江集≫ 등의 인본이 1682년부터 그 뒤 2, 3년간에 나온 것임을 들어 숙종 8년 주조설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숙종 5년에 이 활자로 찍은 ≪행군수지≫가 현존함으로써 주조시기에 대해서는 그 이전으로 추정함이 타당하다. 이 활자는 독특한 소형 필서체이며, 1695년 정부가 사들여 책의 인쇄에 사용하다가 1782년(정조 6)에 재주(再鑄)하였다. 당시 평안도관찰사 서호수(徐浩修)가 왕명을 받아 만든 8만 3660자이며, ‘재주한구자’ 또는 그 해의 간지를 따 ‘임인자(壬寅字)’라 불렸다.
1857년(철종 8) 10월 주자소(鑄字所) 화재로 소실되어 다음해 규장각의 검교제학(檢校提學) 김병기(金炳冀), 제학 윤정현(尹定鉉)·김병국(金炳國) 등이 왕명으로 다시 3만 1829자를 주조하였는데 이를 ‘삼주한구자(三鑄韓構字)’라 한다.
삼주한구자는 자체(字體)에 박력이 없고 솜씨가 거칠어 많이 사용되지 않았던 듯, 그 인본은 거의 전하지 않는다. 다만 그 실물이 국립중앙박물관에 간직되어 있어 고증에 참고가 된다. →활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