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도성에서 상업에 종사하였던 시전 상인의 건물은 사무실에 해당하던 도가(都家)와 판매가 이루어지던 공랑(公廊)으로 구성되었다. 행랑(行廊)으로도 불렀던 공랑은 조선 정부에서 건설하였는데, 건국 초에 수도를 한양으로 옮긴 후 조정에서는 시전 상인들이 안정적으로 상거래를 할 수 있도록 도성 내에 공랑을 설치하였다.
1412년(태종 12)부터 진행된 시전 공랑 조성 사업은 1414년(태종 14)까지 진행되어 총 2,027칸의 공랑을 조성하였다. 공랑이 위치한 구역은 경복궁 남쪽 혜정교부터 종묘 앞 누각까지의 구간과 종루부터 광통교까지의 구간으로 추정된다. 이는 오늘날의 종로 1가∽3가, 남대문로 1가에 해당된다.
공랑의 규모는 시전의 규모와도 같았다. 도성 내 주요 시전이었던 육의전(六矣廛)은 약 100칸이었던 반면, 소소한 시전은 20∽30여 칸의 공랑을 차지하였다. 시전의 공랑 1칸은 다시 6∽10개의 방(房)으로 구분되었는데, 1개 방은 1평 남짓의 작은 공간이었기 때문에 최소한의 상품만을 진열할 수 있었다.
조선 초기에 형성되었던 시전 공랑은 양난을 거치면서 대폭 축소되었다. 이 후 17세기에 회복되어 18세기에 이르면 칠패(七牌)와 이현(梨峴) 시장권이 형성되었는데, 칠패 시장은 서소문∽남대문 밖에, 이현 시장은 도성 내 어의동에 위치하였다. 이는 오늘날 칠패로와 배오개길에 해당한다. 한편 칠패 시장은 현재의 남대문 시장으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조선 정부는 시전 상인에게 세금을 부과할 때 2가지 방법을 사용하였다. 하나는 자릿세에 해당하는 공랑세(公廊稅)였고, 다른 하나는 영업세에 해당하는 좌고세(坐賈稅)였다. 『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따르면 공랑세는 행랑 1칸 당 매년 봄 · 가을에 각각 저화 20장을, 좌고세는 매달 저화 4장을 호조에 납부하도록 규정하였다.
하지만 17세기 이후로 공랑세와 좌고세는 사실상 폐지되었다. 유형원의 『 반계수록(磻溪隧錄)』에 의하면 조정에서는 시전에게 더 이상 공랑세 등의 상세가 부과되지 않고 대신 칙사, 제사, 장빙, 궁궐 수리 등의 잡역을 부과하였다.
공랑은 시전 상인의 상거래가 이루어졌던 장소였다. 공랑의 규모는 시전의 규모로 직결되었고 서울 내 주요 시전일수록 다수의 공랑을 보유하였다. 조선 정부는 서울 내부의 안정적인 물품 조달을 위하여 직접 공랑을 건설해 주었으며, 그 대가로 공랑세 등의 세금을 징수하였다. 하지만 양난을 거친 후로는 공랑세가 폐지되고 각종 잡역을 수행하는 것으로 세금 징수를 대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