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 왕실에서는 내수사(內需司)를 설치하여 왕실의 재정을 관리하였다. 내수사는 1423년(세종 5)에 만들어진 내수소(內需所)를 1466년(세조 12)에 개칭한 것이다. 이때 내수사는 이조 소속의 정5품 아문으로 정비되었다. 내수사에서 주관하는 각종 왕실 사유재산을 흔히 내탕(內帑)이라고 표현하였으며, 내탕을 보관하는 창고를 내탕고(內帑庫)라고 지칭하였다.
16세기까지 내탕은 주로 장리(長利)를 이용하여 확보하였다. 그러나 세종 대부터 조정 신료들이 장리를 없앨 것을 꾸준히 건의함에 따라 결국 1517년(중종 12)에 장리제도를 없앴다. 이에 따라 왕실에서는 내수사 소속의 노비와 전답을 확대시켜 내탕금을 충당하였다.
내탕금 운영은 17세기를 기점으로 큰 전환을 맞이하였다. 이전에는 내수사에서만 왕실의 사유재산을 관리하던 것과는 달리 17세기 이후로는 각종 명목의 궁방(宮房)이 창설되어 내수사와 함께 내탕을 주관하였다. 궁방은 국왕을 비롯한 왕실 가계원의 생계 유지 및 각종 제향 업무 수행을 목적으로 내수사와 마찬가지로 노비와 전답을 통해 재원을 확보하였다.
궁방은 존속 기간에 따라 영구존속궁, 준영구존속궁 및 비영구존속궁으로 분류되며, 기능에 따라서는 내탕 담당, 제사궁, 왕실 종친의 회계 기능 담당 등으로 나누어진다. 특히 명례궁(明禮宮), 수진궁(壽進宮), 용동궁(龍洞宮), 어의궁(於義宮) 등 4개 궁방은 내탕과 제향을 담당하던 영구존속궁으로 조선 후기 왕실 재정의 주요 기관으로 자리매김하였다. 4궁은 업무상으로는 내수사와 위상이 같았지만, 내수사가 4궁을 포함한 각종 궁방 전반을 관리하였기 때문에 내수사가 더 상위에 있었다.
18~19세기에 내수사와 4궁은 주로 다수의 면세결로 재원을 확보하였다. 면세결의 분포는 19세기 중반까지 전라도와 황해도에 집중된 반면 19세기 후반에는 경기도와 충청도에 집중되었다. 한편 내수사와 각 궁방은 필요한 물품을 주로 서울 시전에서 구매하였는데,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왕실 재정이 궁핍해지면서 시전에 대한 외상과 부채가 증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