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동궁은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에 있던 조선 제13대 왕 명종의 아들인 순회세자의 궁가이다. 순회세자 사후 왕실의 내탕(內帑)을 담당하였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명례궁과 더불어 왕실 내탕 중 왕후 및 왕대비의 내탕을 마련하고 관리하였다. 1907년(융희 1) 궁방 관리인인 도장(導掌)이 폐지되고, 순종 즉위 후 모든 재산을 제실에서 관리하면서 1909년 폐지되었다.
용동궁(龍洞宮)이 언제 건립되었는지 명확히 알 수 없다. 1864년(고종 1)에 작성된 『 대동지지(大東地志)』와 『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攷)』 궁궐조에 “서부 황화방에 있으며 세상에 전하기를, 순회세자(順懷世子)의 옛날 궁이라고 하지만 잘 알 수 없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로 인해 용동궁이 순회세자의 옛 궁이라는 설(說)이 있지만, 『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등에는 이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다.
용동궁에 대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은 모두 왕실 소용의 내탕(內帑)을 수급하고 관리하는 것에서 빚어지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 용동궁의 내탕 소속에 관해서는 숙종 연간에 중궁(中宮), 영조 연간에는 왕대비, 정조 연간에는 자궁(慈宮)으로 기록하고 있어 명례궁(明禮宮)과 더불어 지속적으로 동조(東朝) 소용의 내탕을 관리했음을 알 수 있다.
용동궁과 같은 기능을 했던 명례궁은 본래 명례방에 있던 인목왕후의 본궁이었으나, 임진왜란 이후에 정릉동으로 옮겨 대한제국기까지 존재했었다.
용동궁은 현재의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 덕수궁 내에 있었다. 이곳의 조선시대 행정구역은 한성부 남서(南署) 황화방(皇華坊)이다. 조선 제13대 왕인 명종의 아들 순회세자의 궁방(宮房)이었던 곳으로 알려져 있으나 정확하지 않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명례궁과 더불어 왕실 내탕 중 왕후 및 왕대비의 내탕을 마련하고 관리하였다.
1743년(영조 19)에는 용동궁의 대문이 대정동(大貞洞)으로 나 있으며 명례궁과는 서로 가까웠다고 한다. 시기는 알 수 없지만 후대에 중부(中部) 수진방(壽進坊)으로 옮겨졌다. 1907년(융희 1) 궁방 관리인인 도장(導掌)이 폐지되고, 순종 즉위 후 모든 재산을 제실에서 관리하다가 폐지되었다. 해당 터에는 숙명여학교가 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