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전이 취급했던 종이는 궁궐이나 관청에서 주요하게 소요되었던 물품이었을 뿐만 아니라, 중국으로 가는 사행단의 방물(方物) 품목에서도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였다. 이러한 취급 물품의 중요성 때문에 지전은 조선 초부터 주요한 시전으로 설치되었다. 지전은 종루에서 광통교 방향으로 뻗은 길의 동쪽에 자리하였다.
지전은 특정 상품의 전매(專賣)에 대한 특권과 국역 부담을 지는 유분각전(有分各廛)에 속한다. 국역 부담이 가장 컸던 6개의 시전 즉 육주비전 중에서 지전은 4위에 해당되었다. 육주비전 중 가장 큰 국역 부담이 10푼[分]이었다면 지전은 7푼의 부담을 지고 있었다.
궁중에서 소요되는 종이, 대중국 사행단이 휴대해야 하는 종이, 관청과 한성의 종이 수요는 매우 컸기 때문에 지전에서 거래되는 양은 상당하였다. 지전의 상품 품목도 여러 종류가 있었다. 「한양가(漢陽歌)」에 따르면, 백지(白紙)를 비롯하여 장지(壯紙) · 대호지(大好紙) · 설화지(雪花紙) · 죽청지(竹靑紙) · 상화지(霜花紙) · 화문지(花紋紙) · 초도지(初塗紙) · 상소지(上疏紙) · 궁전지(宮箋紙) · 시축지(詩軸紙) · 능화지(菱花紙) 등 다양한 종류의 종이가 거래되고 있었다.
종이 생산은 전국 각지에서 행해졌으나 전라도 전주지가 유명하였다. 또 그 원료인 저(楮)의 재배도 많았다. 한편, 국내에서 만든 종이도 많았지만 중국에서 수입한 고급지도 특수층들의 수요에 따라 많은 유통이 있었다.
종이의 수요는 시대 발전에 따라 더 많은 수요가 따랐으므로 지전의 국역 부담이 컸음은 말할 것도 없고 일반 백성들에게도 많은 공급이 있었다. 때문에 다른 시전이 시대 변천에 따라 육주비전에서 떨어져 나갔다가 다시 들어오는 등 기복을 보인 반면, 지전은 국역 부담 및 과세 부담을 계속해 육주비전에서 높은 비중을 차지하였다.
17세기 말에는 국용 종이의 조달을 맡은 공인(貢人)으로 별도의 지계(紙契)가 형성되면서, 지전은 지계와도 일정한 관계를 맺게 된다. 지전도 공인권을 획득하여 1:2의 비율로 종이 조달 권한을 분담하였다. 지전은 산하에 방물지계(方物紙契)를 두어 운영하였으며, 외부의 삼남방물지계(三南方物紙契)와도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개성상인의 종이 거래 상황에 대해서는 지전과 지계가 공동으로 대응하였다. 19세기 중반 별도의 지계가 부채 속에 혁파되었을 때에는 이를 이관받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