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종반정으로 인한 정국공신(靖國功臣)과 인조반정으로 인한 정사공신(靖社功臣)이 있다.
정국공신은 1506년 중종반정이 성공한 뒤 9월에 박원종(朴元宗) · 성희안(成希顔) · 유순정(柳順汀)의 주도로 녹훈되었다.
1등에 박원종 · 성희안 · 유순정이 병충분의결책익운정국공신(秉忠奮義決策翊運靖國功臣)으로, 유자광(柳子光) · 신윤무(辛允武) · 박영문(朴永文) · 장정(張珽) · 홍경주(洪景舟)가 병충분의협책익운정국공신(秉忠奮義協策翊運靖國功臣)으로 녹훈되었다.
2등에 운수군 효성(雲水君孝誠) · 심순경(沈順經) 등 13인이 병충분의익운정국공신으로, 3등에 고수겸(高守謙) · 심정(沈貞) 등 31인이 병충분의정국공신으로, 4등에 변준(卞儁) · 변사겸(邊士謙) 등 65인이 분의정국공신으로 녹훈되었다.
그 뒤 1등 공신 유자광 · 신윤무 · 박영문과 4등 공신 일부가 모역 등의 이유로 삭훈당해, 결국 107인이 남은 듯하나 숫자는 기록에 따라 차이가 있다. 일찍부터 과도한 인원을 책록했다는 비판이 있었는데, 조광조(趙光祖) 등 신진 사림의 건의로 1519년(중종 14) 11월 2등 공신 운수군 효성, 3등 공신 심정을 비롯한 76인을 삭훈하였다.
이것이 한 계기가 되어 기묘사화가 일어나 조광조 등은 숙청되고, 같은 해 12월 당시의 삭훈자 전원이 공신호를 회복하였다.
정사공신은 1623년 반정이 성공해 인조가 즉위한 뒤, 같은 해 윤 10월 김류(金瑬) · 이귀(李貴)의 주도로 녹훈되었다. 1등 공신은 김류 · 이귀 · 김자점(金自點) 등 10인, 2등 공신은 이괄(李适) · 이시백(李時白) · 장유(張維) 등 15인, 3등 공신은 이후원(李厚源) · 유백증(兪伯曾) 등 28인이다.
이 중 이괄은 원래 1등에 속했다가 2등으로 내려진데 불만을 품고 난을 일으켰다고 전해진다. 그 밖에 이홍립은 이괄에게 투항한 죄로, 심기원과 김자점은 모역의 혐의로 삭훈되었다. 정식 공신호는 분충찬모입기명륜정사공신(奮忠贊謨立紀明倫靖社功臣)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