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후원은 조선후기 대사간, 이조판서, 우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1598년(선조 31)에 태어나 1660년(현종 1)에 사망했다. 광평대군의 7세손으로 인조반정에 참여하여 정사공신 3등에 책록되었다. 김상헌 등의 천거로 지평에 임명되었으며 병자호란 때에 주전론을 주장하였다. 1644년 심기원의 역모를 진압하는 공을 세우고 형조참판으로 회맹연에 참여하였다. 효종이 추진한 북벌계획에 적극 앞장섰으며 추쇄도감제조로 전국의 노비를 추쇄하였다. 우의정으로 재임할 때 송시열과 송준길을 발탁하여 등용하는 데 힘썼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후 정사공신(靖社功臣) 3등으로 완남군(完南君)에 봉해졌다. 같은 해 태인현감이 되고, 1624년 이괄(李适)의 난 당시에는 결사대를 이끌고 수습에 앞장섰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총융사의 종사관으로 전쟁에 임했으며, 이듬해 포로를 잡은 공로로 녹훈되었으나 이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한다. 이어 단양군수 · 태안군수를 역임한 뒤 중앙으로 돌아와 한성부서윤이 되었다. 그 뒤 1635년 익산군수로 나갔으며, 이 해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듬해 김상헌(金尙憲) 등 제신의 천거로 지평이 되었으며, 문학을 거쳐 장령이 되었다. 이 해 병자호란이 일어나 남한산성이 청군에 포위되어 김류(金瑬) 등이 왕을 강화로 모시려 하자 남한산성의 고수를 적극 주장해 관철시켰다. 이 때 최명길(崔鳴吉) 등이 주화론을 펴자 죽기를 각오해 싸울 것을 주장하였다.
1639년 승지가 되고 이어 수원부사에 천거되었으나 왕이 그를 곁에 두고자 하여 병조참지로 임명하였다. 그 뒤 충청도관찰사로 나가서는 백성들의 힘을 무리하게 쓰지 않고 사풍(士風)을 변경시켰으며, 군정(軍政)을 닦는 데 힘썼다. 이어 강화부유수가 되고 1642년 대사간을 역임한 뒤 이듬해 한성부우윤이 되었다.
1644년 심기원(沈器遠)이 좌의정으로 남한산성 수어사를 겸임하자 이를 기화로 심복의 장사(壯士)들을 호위대(扈衛隊)에 두고 전 지사(知事) 이일원(李一元) 등과 모의, 회은군 덕인(懷恩君德仁)을 추대해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진압하는데 공을 세웠다. 이듬해 호조참판이 되고 이어 대사헌이 되었으며, 1646년 형조참판이 되어 회맹연(會盟宴)에 참여하였다.
1650년(효종 1년) 효종의 북벌모의에 참모가 되어 전함 200척을 준비하는 등 북벌계획에 앞장섰다. 그 뒤 1653년 도승지로 『인조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이어 1655년 예조판서로서 추쇄도감제조(推刷都監提調)가 되어 전국의 노비를 추쇄, 강화를 방비했고, 또한 장악원에 소장된 『악학궤범』을 개간해 사고(史庫)에 나누고 보관하게 하였다. 이어 한성부판윤, 형조 · 공조의 판서를 거쳐, 대사간이 되었으며 곧이어 이조판서가 되었다.
1657년 우의정 때 송시열(宋時烈)을 이조판서, 송준길을 병조판서에 임명하는 등 인재 등용에도 힘을 기울였다. 만년에는 세자좌부빈객 · 지경연사 · 지춘추관사 등을 역임하였다. 성품이 청개(淸介 : 청렴하면서 절개가 곧음)하고 인화를 중히 여겼다. 선(善)을 좋아해 능변으로 악(惡)을 질시했으며, 바쁜 관직생활 중에도 경사(經史)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한다. 1685년(숙종 11) 광주(廣州)의 수곡서원(秀谷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충정(忠貞)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