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덕수(德水). 일찍이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이 되었다.
의주판관으로서 무재(武才)를 발휘하여 이름을 떨쳤다. 1490년(성종 21) 한성판관으로 전임하여 대마도치위관(對馬島致慰官)으로 일본에 다녀왔고, 그 뒤 품계를 뛰어넘어 특별히 하동군수에 제수되었다.
1496년(연산군 2) 노모봉양을 위하여 중앙관직으로의 전임을 요청하자 대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가납되었다. 1500년 다시 변방으로 나가 창성부사가 되었는데, 이 때 의창(義倉)에 불이 난 일로 파직될 뻔하였으나 그의 무재를 중히 여긴 재상들에 의하여 불문에 붙여졌다.
1504년 수원부사가 되어 연산군의 총애를 받고 있던 장녹수(張綠水)가 부당하게 차지한 농토를 농민에게 나누어주어 명관으로 이름이 났으나 이로 인하여 파직되었다. 연산군의 학정이 날로 심해져 박원종(朴元宗)·성희안(成希顔) 등이 반정을 도모하자, 이에 가담하여 군대동원의 책임을 맡았고, 거사중에 진성대군(晋成大君: 중종)의 사저를 호위하였다.
정국공신(靖國功臣) 1등에 책록되고, 하음군(河陰君)에 봉해졌다. 이 해 함경북도병마절도사에 제수되었고 하원군(河源君)에 개봉되었으며, 품계가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올랐다. 1507년(중종 2) 박원종의 추천으로 아들 장언량(張彦亮)과 사위 신숙(申俶)도 정국원종공신(靖國原從功臣) 2등에 책록되었다. 시호는 충렬(忠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