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함양(咸陽). 증조부는 박연(朴衍), 할아버지는 군자직장(軍資直長) 박인숭(朴仁崇), 아버지는 통정대부(通政大夫) 안주목사(安州牧使) 박휘(朴輝)이다. 어머니 능성구씨(綾城具氏)는 영의정(領議政) 구치관(具致寬)의 딸이다.
문무를 겸비하여 처음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나, 무과에 응시하여 급제, 무관으로 진출하였다. 연산군 말년에 박원종(朴元宗)·성희안(成希顔)·유순정(柳順汀) 등이 연산군을 폐하고 중종을 옹립하려고 할 때, 군기시첨정(軍器寺僉正)으로서 군자시부정(軍資寺副正) 신윤무(辛允武), 사복시첨정(司僕寺僉正) 홍경주(洪景舟) 등과 더불어 군대동원의 책임을 맡아 거사를 성사시켰다.
그 공으로 정국공신(靖國功臣) 1등에 책록되고, 함양군(咸陽君)에 봉해졌으며, 호조참판에 올랐다. 이듬해 오위도총부도총관·평시서제조(平市署提調)에 이르렀으나, 대간의 탄핵을 받아 체직(遞職: 관직이 교체됨)되었다.
1508년(중종 3) 다시 서용되어 함양군에 봉해지고 이듬해에 삼포(三浦)에서 왜변이 일어나자 도원수 유순정을 따라 왜변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우고 그 공로로 공조판서에 특진되었다. 그러나 다시 대간의 계속적인 탄핵으로 파직되었다.
그러자 항시 자신을 배척하는 사류(士類)들에게 원한을 품고 동지였던 신윤무의 집에 드나들면서 조정을 비방하는 말을 많이 하였다. 마침내 1513년 신윤무 등과 무인들을 규합하여 영산군(寧山君) 이전(李恮 성종의 열셋째아들)을 추대하고 무신란을 모의하려다가, 의정부의 노비인 정막개(鄭莫介)의 고변으로 발각되어 처형되고 그 아들들도 모두 교수형에 처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