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정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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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숙정문 정측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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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사
유적
서울특별시 종로구 백악산(白岳山) 동쪽 고개에 있는 조선전기 서울 성곽의 4대문 가운데 북쪽 문(門).
이칭
이칭
숙청문(肅淸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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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백악산(白岳山) 동쪽 고개에 있는 조선전기 서울 성곽의 4대문 가운데 북쪽 문(門).
내용

본래 북대문(北大門)이라고도 하였다. 경복궁의 주산(主山)인 백악산(白岳山) 동쪽 고개에 위치하였다.

1395년(태조 4)에 숙청문(肅淸門)이 건립되었으나 1413년(태종 13)에 풍수학생(風水學生) 최양선(崔揚善)이 왕에게 백악산 동쪽 고개와 서쪽 고개는 경복궁의 양팔에 해당하므로 여기에 문을 내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고 두 문을 막을 것을 청하였다. 이를 계기로 창의문(彰義門, 일명 紫霞門)과 함께 폐쇄하고 길에 소나무를 심어 사람들의 통행을 금하였다.

이 문은 높은 산 중턱에 위치하고 있어 길이 매우 험하다. 또 성문을 나서면 북한산이 가로막고 있어서 동쪽으로 성북동 골짜기를 따라 내려와 동소문(東小門 : 혜화문) 밖 경원가도로 나오는 길 외에는 다른 길이 없었다. 한양에 출입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동소문을 통과했지 숙정문을 이용하고자 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숙정문보다 동소문이 한양 출입에 훨씬 빠르고 편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이 문을 폐쇄해도 통행에 아무런 지장이 없어서 영구히 닫아 두었다. 다만 주1가 심할 때에 이 문을 열고 남문인 숭례문(崇禮門: 南大門)을 닫는 풍속이 있었다. 음양오행(陰陽五行)에서 북은 음(陰)이며 남은 양(陽)이라고 한다. 한재 때 양을 억제하고 음을 부양해야 한다는 것으로 1416년(태종 16)에 처음 시작하였다.

숙청문을 열어 놓으면 장안의 여자가 음란해지므로 항상 문을 닫았다는 속설(俗說)도 전하고 있다. 그것은 이 문이 음방(陰方: 여자의 방위)에 있는 까닭에 이런 말이 나온 것으로 보인다.

이 문은 1504년(연산군 10)에 조금 동쪽으로 옮겨 세웠는데 이 때 석문(石門)만 세우고 주2는 건축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1976년 대통령의 특명으로 서울시에서 백악산 일대의 성곽을 복원할 때 태조 창건 당시의 제도에 의해 문루를 건축하고 ‘肅靖門(숙정문)’이라는 편액을 걸었다.

어느 때부터 무슨 이유로 숙정문으로 개칭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1523년(중종 18) 『중종실록』의 기사 이후 역대 각 실록에 모두 숙정문으로 기록되고 있어 숙정문이라 호칭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한편 1531년(중종 26) 북정문(北靖門), 1587년(선조 20) 숙정문(肅靜門)으로도 표기된 것을 볼 때, ‘정숙하고 고요한 기운을 일으킨다’는 의미에서 ‘숙정문(肅靖門)’으로 명명하지 않았나 추측된다. 다락 없는 암문(暗門)인 것이 특색이다. 항상 닫혀 있었기 때문에 흔히 숙정문 대신에 창의문을 북문이라고 하였다.

참고문헌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중종실록(中宗實錄)』
『서울육백년사』 1(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1977)
주석
주1

가뭄으로 인하여 생기는 재앙. 우리말샘

주2

궁문, 성문 따위의 바깥문 위에 지은 다락집.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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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이장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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