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시대 9대 간선로 중 가장 중요한 도로의 하나로 총 연장 약 1,080리의 교통 통신로였다. 이는 역원제(驛院制)가 국지적으로 실시되던 고구려 시대부터 이루어지기 시작하여 전국적으로 실시된 고려 시대에 그 기반이 갖추어졌다. 조선 시대에 들어와 중종대에 역원제가 정비되면서 그 모습이 완전히 갖추어졌다.
행정 구획상 경기도·황해도·평안도에 걸쳐 있었으며, 영서도(迎曙道)·금교도(金郊道)·대동도(大同道)의 세 역도(驛道)의 관할 하에 있었다. 의주로에는 주요 지선이 30개나 연결되어 있었으며,
모두 26역이 분포하여 있었다. 이들은 대부분 행정 중심지 부근에 위치하였으며, 역 이외에 공무 여행자를 위한 원(院)이 설치되었으나 그 구실은 잘 수행되지 못하여 조선 말기에 대부분 폐지되었다.
이 길은 중국으로 통하던 중요한 육상 교통로로서 사신들의 내왕이 잦았으며, 양국 사신들을 위한 휴식처와 숙박소로서 모두 25개의 관(館)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 밖에 휴식처로서 납청정(納淸亭)과 홍제원(弘濟院)이 있었다. 사신들의 왕래는 부수적으로 국제무역이라 할 수 있는 상업 활동을 수반하였으며, 의주로에서의 상업 활동은 이를 제외하면 미약한 편이었다.
사신의 행렬은 15일 정도 걸렸으며, 공문서의 전달은 3급의 문서가 4∼6일 정도 걸렸다. 도로에는 5리(里)마다 정자(亭子), 10리마다 소후(小堠), 30리마다 대후(大堠), 유류(楡柳)를 두어 이수(里數)와 지명을 기입하였고 휴식처로써 여행자의 편의를 도모하였다.
통신의 구실로는 군사 문서의 전달을 주목적으로 하는 파발제(擺撥制)를 들 수 있는데, 이는 임진왜란 이후 봉수제의 보완을 위하여 이루어진 것이었다. 파발제에서 서로(西路)로 불렸던 의주로의 파발은 기발(騎撥)이었다. 역과 같은 구실을 하지만 숙식은 제공하지 않았던 참(站)은 대략 25리마다 하나씩 모두 45참이 설치되어 있었다.
이들 역시 군사 요지를 겸하는 행정 중심지 부근에 분포한 경우가 많았다. 교통 통신의 기능을 지녔던 의주로는 지방 통치상, 중국과의 관계상, 국방상의 문제 등으로 경제적 기능보다는 정치 군사적 기능이 더 강하였던 도로였으며, 조선 말기 경의선의 개통과 함께 이루어진 새로운 육상 교통로인 신작로의 형성에 근간을 제공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