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 능산리 사지는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에 있는 567년에 조성된 백제의 왕실사찰이 있던 터이다. 이 사찰은 능산리 고분군 인근에 위치해 있으며, 창왕(위덕왕)이 아버지 성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조성하였다. 이후 백제 사비기 국왕들의 명복을 기원하였으며, 백제 멸망과 함께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건물은 목탑, 중문, 금당, 강당이 남북 일직선상에 배치된 1탑1금당식이다. 출토 유물로는 국보로 지정된 백제금동대향로, 석조사리감이 있다. 이 유적은 보존상태가 양호하고 명확한 축조연대를 확인할 수 있어 삼국시대 건축은 물론 동북아시아 건축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부여 능산리사지는 백제가 사비로 천도하면서 조성한 왕실사찰의 절터로서 일명 ‘능사(陵寺)’로도 불린다. 2001년 9월 29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능산리사지는 사비 도성의 외곽을 둘러싼 나성(사적, 1963년 지정)과 부여 왕릉원(사적, 1963년 지정) 사이의 골짜기에 위치한다. 1992년부터 국립부여박물관에서 조사를 진행하여 사찰의 구체적 현황을 파악하였으며, 최근까지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와 한국전통문화학교에서 사찰의 부속시설에 대한 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발굴조사를 통하여 백제 왕릉군으로 널리 알려진 인근의 능산리고분군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사비기 백제 국왕들의 무덤이 능산리사지 곁에 조영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능사는 그들의 명복을 빌었던 기원사찰[願刹]로 이해된다.
1993년에 진행한 2차 발굴조사에서 백제금동대향로(국보, 1996년 지정)가 출토되었으며, 1995년 4차 발굴조사에서는 목탑지 심초석 하부에서 부여 능산리사지 석조사리감(국보, 1996년 지정)이 발견되었다. 여기에서 확인된 명문을 통하여 백제 창왕 13년(567)에 왕실 주도하에 사찰이 조영되었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능산리사지는 중문-목탑-금당-강당이 남북 일직선상에 배치된 일탑일금당식(一塔一金堂式)의 가람배치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사역 서쪽에서 경내로 진입하는 도로유구와 다양한 재료와 형식으로 설치된 수로, 집수조, 우물 등 다수의 치수시설도 확인되었다.
따라서 사찰 외부에서 중문지를 거쳐 사역 중심부의 의례공간으로 직접 연결되는 하나의 동선과 각종 치수관련 시설의 선후관계를 통하여 가람의 시기별 변화과정을 살필 수 있게 되었다.
목탑터는 이중기단으로 남쪽과 북쪽에 계단시설이 있다. 중심부의 심초석 위에서 명문이 있는 ‘백제창왕명석조사리감’이 출토되어 축조 연대와 발원자를 알 수 있게 되었다.
금당터는 목탑터와 마찬가지로 이중기단으로 되어 있으며, 정면 5칸, 측면 3칸이다. 강당터는 길이가 37m나 되는 거대한 규모이다. 공방시설이 두 군데에서 발견되었는데, 제3건물터의 중앙 방의 목곽수조 안에서 ‘백제금동대향로’가 발견되었다.
도로의 노면은 잘 다져진 황갈색 혹은 적갈색 사질토로 포장되어 있으며, 도로 가장자리에 작은 석열을 두어 경계를 표시한 부분도 확인된다. 도로면의 하부에는 자갈돌이나 20㎝ 내외의 돌과 마사토를 섞어 성토한 층이 발견되며, 저습지 구간에서는 나뭇가지를 깔아 지반의 침하를 완화시키는 방법이 사용되기도 하였다.
출토된 유물은 백제금동대향로, 백제창왕명석조사리감을 비롯하여 와전류, 토기류, 금속류, 목제류 등 다수의 유물이 출토되다. 특히 30여 점의 목간이 출토되었는데, 목간은 현재까지 백제유적에서 가장 많은 수량이 확인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를 통하여 백제사 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가 될 것으로 판단된다.
부여 능산리사지는 잔존상태가 양호할 뿐만 아니라 출토유물에 있어서도 명확한 시대편년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삼국시대 건축은 물론 동북아시아 건축사 연구에 획기적인 자료이다. 특히 국보로 지정된 ‘백제금동대향로’와 ‘부여 능산리사지 석조사리감’을 통하여 백제의 사상과 조형 예술, 그리고 금속공계 기술을 살필 수 있다.
목탑터에서 발견된 사리감의 명문을 통하여 567년에 성왕의 명복을 기원하기 위하여 창간된 왕실의 기원사찰임을 알 수 있으며, 660년백제 멸망과 함께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