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장조(莊祖)와 그의 비 헌경왕후(獻敬王后)의 능이다. 근처에 위치한 건릉(健陵)과 함께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장조는 1735년(영조 11) 창경궁에서 탄생해 그 이듬해에 세자에 책봉되고, 1762년 28세 때 창경궁에서 죽었는데, 영조가 뒤에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 뒤 정조가 즉위하자 장헌세자(莊獻世子)라 하고 고종 때 장조로 추존되었다가 1899년 의황제(懿皇帝)로 다시 추존되었다.
헌경왕후는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의 딸로서 1744년 세자빈에 간택되었다가 세자가 죽은 뒤 1762년 혜빈(惠嬪)의 호를 받았다. 1776년(정조 즉위년) 아들 정조가 즉위하자 궁호가 혜경(惠慶)으로 올랐다. 1815년(순조 15) 80세로 창경궁에서 죽었는데, 1899년 의황후(懿皇后)로 추존되었다.
융릉은 원래 경기도 양주시의 배봉산(拜峰山)에 있었던 영우원(永祐園)을 수원의 옛 도읍 뒤의 화산(花山)으로 옮겨 현륭원(顯隆園)이라 하였다. 정조는 현륭원을 마련할 때 온갖 정성을 기울였다. 그 결과 조선시대의 어느 원보다도 후하고 창의적인 상설(象設)을 하였다.
능상설은 병석(屛石)을 두르고 인석(引石)은 화뢰형(花蕾形)으로 하고 문무석인을 세웠다. 장명등은 전기의 8각 장명등과 숙종 · 영조 연간에 등장한 4각 장명등의 양식을 합한 새로운 양식으로 만들어 세웠다.
석인도 예전에는 가슴까지 파묻혀 있던 목이 위로 나와 있어 시원한 분위기를 나타내는 등 조각 수법이 사실적이다. 능의 뒤에는 곡장(曲牆)을 돌렸다. 19세기 이후의 능석물 양식(陵石物樣式)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