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제시 포교리와 월승리 일대의 저수지를 ‘벽골제(碧骨堤)’라고 하며,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되고 규모가 큰 저수지로 알려져 있다. 이 유적은 농업 국가로서 일찍부터 농사를 위해 수리 시설을 갖춘 조상의 슬기를 엿볼 수 있는 곳이다.
벽골제에 대한 연혁을 살펴보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330년(신라 흘해왕 21)에 공사를 시작해 790년(신라 원성왕 6)에 증축했다고 했고, 『동국여지승람』과 『세종실록지리지』에는 고려 현종 및 인종 때와 조선 1415년(태종 15)에 개축했다고 했다.
김제시 부량면 포교리를 기점으로 하여 남쪽으로 월승리에 이르는 평지에 남북으로 일직선을 이루고 약 3㎞에 달하는 제방이 현재 남아 있다. 부수 시설로는 제방의 남단 수문지였던 경장거(經藏渠)와 북단 수문지였던 장생거(長生渠), 그리고 중앙 수문지였던 거대한 석주(石柱)들이 우뚝 서 있다.
1925년 일제에 의한 동진수리조합에서 이 제방을 농지 관개용의 간선수로로 개조해 제방의 폭이 두개로 갈라졌으며, 양분된 제방의 중앙을 수로로 만들어 농업 용수를 흐르게 한 탓에 원형이 크게 손상되었다.
1975년에 실시된 일부의 발굴 조사에 의하면 제방의 높이는 북단이 4.3m이고, 남단이 3.3m이다. 수문의 구조는 길이 5.5m의 석주를 4.2m 간격으로 세우고 석주의 안쪽에 너비 20㎝, 깊이 12㎝의 홈〔凹溝〕을 만들어 여기에 목제 둑판을 넣고 상하로 이동시켰는데, 방수량(放水量)을 조절한 것으로 짐작된다.
수문 밖에 마련된 방수로(放水路)는 양쪽에 일정한 크기로 가공된 장방형의 큰 석재를 사용해 대규모의 석축을 하였다. 수로의 바닥에는 평평하고 커다란 돌들을 깔아 웬만한 방수량에도 잘 견딜 수 있게 하였다.
제방은 세 번에 걸쳐서 판축되었는데, 판축토 아래에 두께 2㎝ 정도의 흑색 식물 탄화층이 있었다. 이 탄화물로 세 차례에 걸쳐 방사성탄소 측정(放射性炭素測定)을 해본 결과 4세기라는 결과가 나와 문헌의 기록과 일치함을 알 수 있었다.
발굴 결과 벽골제는 부분적인 개수 공사는 있었다 할지라도 전장 3㎞에 달하는 제방과 수문 석주 및 그 전면의 호안석축(護岸石築)들은 처음 지을 때부터 현재와 같이 거대한 규모였음이 밝혀졌다.
제방의 북쪽 기점인 포교리 근처의 초혜산(草鞋山, 신털뫼) 정상 남단에 벽골제중수비가 세워져 있다. 석비의 크기는 높이 6.4척, 너비 3.4척으로 점판암제(粘板巖製)인데 비문은 마모되어 판독이 불가능하다.
이곳은 4세기 삼국 사회의 토목, 측량, 석공 등 여러 기술의 발달 수준을 해명할 수 있는 중요한 유적으로 1963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