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숙종 때 창건하였으나 당시의 규모는 크지 않았다. 예종 때 크게 경영된 흔적이 보이는데, 『고려사』 예종 원년(1106) 9월 10일조에 의하면, 평장사 윤관(尹瓘)에게 중창할 것을 명하였다.
원래 이 절 부근에는 약사원(藥師院)이라는 절이 있었는데, 대신들이 천수사의 절터가 불리하니 약사원을 헐고 그 자리에 천수사를 짓게 하자고 주장하였다. 이에 예종은 1111년 약사원의 자리에 천수사를 옮겨 짓도록 하였고, 1116년에 준공하여 숙종과 명의 왕후의 영정을 봉안하였는데, 이 절이 숙종의 원찰이었기 때문이다. 그 뒤 예종 · 숙종 · 의종 등이 자주 행차하였으며, 1260년(원종 1)에는 고종 목주(木主)의 혼전(魂殿:임금이나 왕비의 국장 뒤에 3년 동안 신위를 모시던 전각)을 이 절에 옮겼다. 1276년(충렬왕 2) 충렬왕이 공주와 함께 이 절에 행차하였다. 특히, 이 절 주위의 풍치가 아름다워 사신을 맞이하거나 놀기에 적합한 장소였기 때문에 이곳에서 풍악을 울리면서 사신들을 맞이하고 전송하였다고 한다.
고려의 패망과 함께 이 절은 폐사가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주춧돌만 남게 되었지만, 그곳이 교통의 요충지라는 중요성 때문에 그 일대를 천수원(天壽院)이라 하고 역원(驛院)을 만들었다. 1476년(성종 7)에 이예(李芮)가 이 절을 중창하고자 상소문을 올리기까지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현재 천수원 부근에는 몇 군데 봉수가 남아 있다. 절터 서쪽에는 취적교(吹笛橋)라는 다리가 있는데, 김진사라는 사람이 피리를 잘 불어 달 밝은 밤에 뱀 모양의 두건을 쓰고 피리를 불다가 뱀으로 변하여 물속으로 들어갔다는 전설이 전한다. 또, 동쪽에 있는 나복교(羅伏橋)는, 신라 경순왕이 이 다리에서 왕건에게 투항하였는데, 그 때 신라 대신들 중 다리 밑으로 떨어져 죽은 사람이 너무 많아서 이와 같은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이 밖에 예종 때의 화가 이녕(李寧)이 「천수사남문도(天壽寺南門圖)」를 그려 왕의 칭찬을 받았다는 기록이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