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면적은 43,587㎡. 사직은 토지를 관장하는 사신(社神)과 곡식을 주관하는 직신(稷神)을 가리킨다. 두 신을 제사지내는 단을 만들어 모신 곳이 사직단(社稷壇)이다. 조선시대 사직단을 관장하던 관청은 사직서(社稷署)였다.
『국조오례서례(國朝五禮序禮)』에 기록되어 있는 조선 초기의 사직단을 보면, 한 가운데에 사단과 직단이 각각 동쪽과 서쪽에 위치하였는데 너비는 2장 5자이고 높이는 3자였다.
유의 한쪽 면의 길이는 25보(步)였으며, 사방으로 홍살문이 있었다. 그 밖으로 다시 네모난 담장이 둘러쌌으며 이 담장에도 역시 사방으로 홍살문이 있었다. 특히 홍살문은 모두 문이 하나인데 담장의 북문은 3개의 문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신이 출입하는 문이므로 격을 높이기 위한 것이었다.
유의 바깥 서남쪽에 신실(神室)이 있고 유의 북문과 담장의 북문 사이에는 국왕이 서 있는 자리인 판위(版位)가 있었다.
사직단은 임진왜란으로 건물들이 모두 불타버리고 단만 남았다. 신위는 개성의 목청전(穆淸殿)에 묻어 보관되었다가 평양으로 옮겨졌으며, 선조가 의주로 피난하게 되자 세자가 받들고 황해 · 강원도 등으로 다니다가 환도해서는 심의겸(沈義謙)의 집에 종묘의 신위와 함께 모셨다.
1596년(선조 29)에 신실을 지어 봉안하였다. 사직단이 완전히 중건된 시기는 명확하지 않으나 1603년(선조 36)에 사직단에 관한 기사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1608년(선조 41) 종묘가 중건되기 전에 복건된 것으로 보인다.
중건된 사직단은 초기의 모습을 거의 그대로 따랐지만 높이가 3자 4치이고 유의 한쪽 면의 길이가 22보인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규모에서 약간 차이가 있었으며 부속 건물의 위치에서도 차이가 있었다.
1783년(정조 7) 편찬된 『사직서의궤(社稷署儀軌)』의 「사직서전도(社稷署全圖)」에는 부속 건물이 이전보다 많이 늘어났다. 서쪽에 제기고, 재생전, 전사청, 잡물고, 수복방 등이 위치하고 동쪽에 악기고, 안향청, 차장고, 악공청, 부장직소 등이 위치하는 등 양쪽에 퍼져 있었다.
사직에 제사드리고 관리하는 일이 더욱 많아지고 세분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는 사직의 규모가 매우 축소되었으며 부속 건물 가운데 재실(齋室)로 쓰이던 안향청과 정문만이 남아 있다.
조선의 사직 제사는 1년에 3번, 봄 · 가을 납일(臘日)에 제사를 지내고, 기고(祈告) 제사도 사직에서 지냈다. 주현에서 지내는 사직 제사는 봄 · 가을 두 번 지냈으며, 국왕 대신 그 지역의 수령이 제사를 지냈다. 사직단은 종묘와 더불어 ‘국가’ 자체를 지칭하는 대명사로 쓰일 정도로 상징적인 곳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