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3년 3월에 발표되었던 국제연합한국부흥단(UNKRA)의 ‘한국경제재건계획(네이산보고서)’이 있었으나, 원조정책의 일환으로 작성된 건의보고서로서 공식적으로 채택되지는 않았으며, 1959년 3월 부흥부 산하에 있던 산업개발위원회에서 작성된 경제개발3개년계획안(1960∼1962)이 정부가 마련한 경제개발계획의 시초이다.
그 뒤 제2공화국에서는 이 계획안을 토대로 경제개발5개년계획(1961∼1965)을 작성하였으나 여건의 변화로 말미암아 실시되지 못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1962년부터 본격적인 경제개발계획이 실시되어 오고 있다.
1962∼1966년. 목표는 모든 사회적·경제적인 악순환을 시정하고 자립경제의 달성을 위한 기반을 구축하는 데 있었다. 그리고 성장여건의 조성을 위한 기본 방향을 ① 전력·석탄 등의 에너지공급원의 확보, ② 농업생산력의 증대, ③ 기간산업의 확충과 사회간접자본의 충족, ④ 유휴자원의 활용, ⑤ 수출증대를 주축으로 하는 국제수지의 개선, ⑥ 기술의 진흥 등에 중점을 두고 추진하였다.
성과는 경제규모면에서는 이 기간의 연평균성장률이 7.8%로서 계획을 초과하였고, 산업별로는 특히 광공업 부문이 급성장하여 산업구조의 개선에 적지 않은 진전을 가져왔다.
즉, 전기업을 포함한 광공업의 연평균성장률은 14.3%, 농수산업은 5.6%, 사회간접자본 및 기타 서비스업이 8.2%를 나타냄으로써 목표연도의 산업구조는 기준연도(1960)의 농림수산업이 37.3%, 광공업이 19.0%, 사회간접자본 및 기타 서비스업이 43.7%로 개선되었다.
이리하여, 성장면에서는 계획목표가 달성되었으나, 자본형성면에서는 계획기간 중 연평균투자율이 15.6%로서 당초 계획의 22.6%에 비하여 7.0%포인트나 낮았다. 투자의 산업별 배분은 농림수산업이 8.5%, 광공업이 26.1%, 사회간접자본 및 기타 서비스업이 65.4%를 각각 차지했다.
그러나 수출은 1966년 2억 5580만 달러로서 계획보다 1억1800만 달러나 초과하였고, 그 가운데 공산품의 수출이 62.3%로서 현저한 수출구조의 개선을 보였으며, 한편 수입은 약 6억 8000만 달러에 달했다.
이와 같은 제1차 경제개발계획의 문제점으로는 양적인 성장에도 불구하고, 기초공업의 빈약, 투자재원체제의 미비, 식량자급의 실패, 소득의 편중적인 분배 등을 들 수 있다.
1967∼1971년. 그 동안의 경험과 정비된 통계자료를 이용, 계량모형화하였고, 국내의 경제여건과 시장기구 등을 다각적으로 반영한 장기전망을 토대로 하였다는 점에서 계획기술상으로 제1차 경제개발계획보다 훨씬 우수하였다. 이 기간의 기본 목표는 산업구조를 근대화하고 자립경제 확립을 더욱 촉진시키는 데 두었다.
기본 방향은 ① 식량의 자급, ② 철강·기계 및 화학공업에 중점을 둔 공업구조의 고도화, ③ 수출증진과 수입대체에 의한 국제수지의 개선, ④ 고용증대와 인구팽창 억제, ⑤ 국민소득의 향상, ⑥ 기술수준과 생산성제고 등에 중점을 두었다. 개발전략은 수출증대와 수입대체로 집약되며 개방경제체제하의 자립도의 제고에 있었다.
이 기간에는 본격적으로 공업화가 추진되었으며, 수출의 급성장과 더불어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9.7%로서 계획을 초과 달성하였다. 이와 같은 높은 성장률은 우리 나라 경제를 도약의 발판 위에 올려놓았다.
산업 부문별 성장률은 광공업과 사회간접자본 및 기타 서비스업에 있어서 19.9% 및 13.2%로 계획을 초과한 반면, 농림수산업은 계획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1.5%에 머물렀다. 이에 목표연도인 1971년의 산업구조는 농림수산업 29.3%, 광공업 19.5%, 사회간접자본 및 기타 서비스업 51.2%의 구성을 나타내고 있다.
특히, 이 기간 동안 세계경제의 자유무역주의의 확대로 수출이 크게 신장되었으며, 우리 나라도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에 가입하고 케네디라운드(Kennedy Round)에 참여 등 개방체제를 적극 이행한 시기였다. 그리고 수출은 연평균 38.0%나 증대되었고, 1971년 수출 11억 3000만 달러를 달성하여 10억 달러 고지를 돌파하였다.
국민경제의 수출의존도는 제1차 경제개발계획 때는 평균 8.0%에 불과했으나 이 기간에는 15%로서 2배에 가까워졌으며, 제1차 경제개발계획기간에는 전력·비료·섬유·양회 등 기초산업과 내수산업이 성장을 주도했으나, 이 기간 동안 합성섬유·화학섬유·전기기기 등 공산품이 수출산업에서 86.0%를 차지함으로써 산업구조의 전환기를 가져왔다.
그러나 투자수요의 격증과 투자재의 해외의존율이 늘어나 국민경제의 수입의존도도 이 기간 동안 26.2%나 증가하여 수입액도 21억 8000만 달러에 이르렀다. 특히, 이 기간에 실시된 정책 중 농업의 근대화를 위한 경지정리 등 농업생산력 증진과 1968년부터 농업소득을 위한 고미가정책, 1970년부터 시작한 새마을운동은 농촌근대화와 농어민 소득향상에 결정적인 구실을 하였다.
그러나 문제점은 고도성장의 메커니즘이 해외의존적이어서, 즉 투자재원 조달에 있어서 40% 이상을 외채에 의존함으로써, 외채의 증대, 국제수지의 악화, 기업의 부실화, 농업의 계속적 정체 및 고질화된 인플레이션 등을 들 수 있다.
1972∼1976년. 기본 목표는 산업구조의 고도화와 균형성장을 위한 성장·안정·균형의 조화에 두고, 그 기본 방향은 중화학공업의 육성과 자본재의 수입의존도를 지양하고 국민경제의 자립화기반을 더욱 다지면서 ① 산업구조의 고도화, ② 국제수지의 개선, ③ 주곡의 자급, ④ 지역개발의 균형에 치중함으로써 전반적인 성장과 안정의 균형을 시도하였다.
제1차 개발계획은 성장의 여건, 제2차 개발계획은 양적인 성장에 치중하였지만 제3차 개발계획은 질적인 충실화에 두었다. 특히, 전세계적으로 겪었던 석유파동이라는 중대한 시련과 불황에 직면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 기간의 연평균경제성장률이 9.7%로 높은 것은 획기적인 수출신장에 힘입은 바 컸다. 즉, 1976년 수출이 78억 1000만 달러의 규모에 도달함으로써 5년 동안에 무려 7배의 수출증가를 기록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특징은 철강·수송용 기계·전자공업·조선공업 등 중공업이 성장산업으로 등장하면서 중화학공업의 구성비율을 한층 높이고, 자본재의 대외의존도를 경감시켰다는 점이다.
또한, 국민저축률은 국민소득의 증가와 저축수단의 다양화 등 정책효과에 기인하여 1971년의 19.6%에서 1976년에는 21.4%로 증가했고, ‘8·3조치’에 의한 사금융의 양성화와 기업금융의 개선도 크게 주목되었으며, 이와 병행하여 <기업공개촉진법>의 제정 및 ‘5·29조치’ 등에 의하여 강력히 기업공개를 추진하고 직접금융을 확대하였다.
제3차 경제개발계획은 두 차례의 경제계획이 성공적으로 끝나자, 경제전문가들과 정책관계자들이 자신감을 가지고 시장기능을 중시하고 각종 유인책에 따라 민간 부문 기업활동을 촉진하게 하는 정책으로 전환하였다. 따라서, 제3차 경제개발계획이 끝나는 1970년대 후반으로 접어들자 우리 나라 경제는 차차 후진국의 굴레를 벗어나 신흥공업국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기간에 드러난 문제점도 제2차 개발계획에서 나타났던 투자재원 조달에서의 외채의 비중 증대, 공업구조의 취약성, 만성적인 국제수지적자와 인플레이션의 확대연장이 되고 말았다.
1977∼1981년. 제1·2·3차 개발계획과는 달리 사회개발의 필요성과 형평의 문제가 크게 부각되자 계획목표는 자력성장구조의 실현, 사회개발을 통한 형평의 증진, 기술혁신과 능률의 향상에 두고, 기본 방향은 3차에 걸친 계획의 전략을 이어받아 ① 철강·석유·비료·양회·기계·전자·조선 등의 중화학공업을 중심으로 한 공업화전략, ② 사회간접자본의 계속적인 확충, ③ 국제경쟁력 강화를 위한 능률향상과 기술개발에 중점을 두었다.
그러나 1980년 경제개발계획을 착수한 이후 최대의 경제적 시련을 겪는 동시에, 모든 부문에서 계획을 크게 밑도는 결과를 초래함으로써 경제난국을 맞게 되었다. 즉, 당초 계획에서 성장률은 3∼5%에서 -5.7%로 크게 떨어졌으며, 물가에서도 도매물가는 27∼28%에서 44. 2%로, 소비자물가는 22∼23%에서 34.6%로 계획치보다 크게 웃돌았다. 그리고 총통화증가율도 계획치의 20.0%에서 26.9%로 증가되었다.
따라서, 총소비증가율은 3.1%에서 0.7%로 감소되었고, 실업률도 1979년의 3.8%에서 5.2%로 높아졌다. 이러한 마이너스성장의 원인은 무엇보다도 1979년의 제2차 석유파동에서 비롯한다.
또한, 세계정세의 전반적인 불황으로 인한 수출수요의 둔화와 국제원자재가격의 계속적인 상승에 따른 해외요인과 이상기후로 인한 농작물의 큰 흉작, 국내정치의 불안정 및 사회적 혼란 등 경제외적인 요인이 복합된 결과로 보인다.
그러나 근본적인 요인은 기업경쟁력 약화에 따른 대외경쟁력의 저하에 있었다. 기업경영면을 살펴보면, 총매출액증가율은 1979년의 11.4%에서 1980년에는 0.1%에 불과하였고, 수익성 면에서는 오히려 총자본이익률이 -0.2%, 자기자본이익률은 -1.3%로 감소된 결과를 가져왔다.
따라서, 1980년 국민총생산은 1975년 불변가격으로 13조9213억 원에 그쳐, 1979년 14조8568억 원에 비해 무려 5.7% 감소를 나타냄으로써 1인당 국민총생산도 1979년 1,597달러에서 1,508달러로서 89달러가 줄어들게 되었다.
이와 같이 우리 나라의 경제는 이 기간에 석유파동으로 인한 세계경제의 불황으로 경제전반에 대하여 새로운 개편문제가 제기되었는데, 그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한 문제점으로는 인플레이션과 국제수지의 악화를 들 수 있다.
1982∼1986년. 목표를 경제성장의 지속과 사회발전을 통한 국민복지향상에 둠으로써 명칭도 종래의 ‘경제개발계획’에서 ‘경제사회발전계획’으로 바뀌었다.
이 계획의 기본방향은 물가안정의 기반구축, 국제수지의 개선, 생산성의 향상, 사회발전의 촉진, 합리적인 제도의 발전 등에 두었다. 그러나 국내외 여건의 변화에 따라 제2차 연도인 1983년 수정계획을 수립하게 되었다.
수정계획의 기조는 원래 계획의 기본이념을 살리면서 항구적으로 안정을 지속시키고, 산업의 경쟁력을 향상시켜 국제수지의 균형을 달성하며, 불균형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실천적인 집행계획을 시행하는 데 두었다.
즉, 경제성장률은 7.5%의 건실한 성장을 지속시키고, 소비자물가상승률을 2∼3%로 안정시키며, 경상수지를 4억 달러 흑자를 유지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 계획기간의 실적을 추정치로 살펴보면, 연평균경제성장률은 8.6%를 달성하여 1986년의 1인당 국민총생산이 2,268달러에 이르렀다. 농림어업 부문은 3.7%, 광공업 부문은 10.0%, 제3차산업 부문은 9.2%의 성장률을 기록하여 아직도 제1차산업이 상대적으로 낙후되었음을 알 수 있다. 소비자물가상승률은 3.5%로 물가안정을 유지하였으며, 1986년 수출 336억 달러, 수입 293억 달러를 기록하였고, 경상수지는 45억 달러의 흑자를 달성하였다.
1987∼1991년. 기본 방향은 자율과 경쟁에 입각하여 자원이 배분될 수 있도록 시장경제의 원활한 운용을 도와 주고, 분배의 공평을 도모하는 데 두고 있다. 이 계획은 달러화의 가치가 최고 수준에서 떨어지기 시작하고 또한 미국의 금리나 석유가격도 떨어지게 되는 시점인 1985년에 시작하여 1986년에 완성된 계획이다.
계획시행 첫 해인 1987년부터 이른바 3저현상으로 국제수지 흑자가 크게 증가하기 시작하였고 이에 따라 물가상승, 주가급등, 부동산가격 상승 등 많은 부작용이 시작하였으므로 계획초년부터 6차 계획 수정작업이 이루어졌다.
원래의 계획 목표는 ① 경제사회의 제도와 질서확립, ② 산업구조 개편과 기술수준의 향상, ③ 지역사회의 균등발전의 세 가지였으나 수정계획에서는 경제의 개방화와 국제화에 두었고 노조활동과 관련하여 서민생활의 안정과 공정성 확보 등이 중요 목표가 되었다.
1992∼1996년. 이 계획은 한국경제와 사회가 당면한 각종문제를 연구검토하여 작성되었다. 이 계획은 무엇보다도 한국이 선진국 진입문턱에 도달하는 기간의 계획이며 1인당 소득 1만 달러 목표달성을 좌우하는 시점의 계획이란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계획은 제6차 계획과 더불어 형평의 제고와 조화있는 국제화추진을 중요한 목표로 삼고 있다.
1993년 새정부가 들어서면서 계획의 수정을 국민이 함께 참여하는 경제에 바탕을 둔 신경제계획을 수립하였다. 중점 목표는 ① 산업의 경쟁력 강화, ② 사회적 형평제고와 균형발전, ③ 국제화 및 자율화의 추진과 통일기반 조성에 두었다. 이 계획기간 중에는 1996년 GNP가 1만 440달러에 달하였고 수출입액은 각각 1,350달러를 달성하였다. 그러나 노사분규와 대외적인 개방압력으로 기업의 도산과 국제수지의 큰 적자를 가져왔다.
1962년에 시작된 경제개발계획은 1986년까지 5차의 계획기간을 거쳐 계속 추진되고 있다. 경상가격으로 볼 때 1966년의 국민총생산은 37억 달러였는데, 1986년에는 추정치로 940억 달러에 이르고, 1인당 국민총생산은 125달러에서 2,268달러로 증가하였다. 농림어업·광공업·제3차산업의 비율이 1966년 37.3:19.0:43.7이던 것이 1986년 13.1:31.2:55.7로 되어서 대체로 산업구조가 고도화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수출은 1966년 2억 5000만 달러에 불과하였으나 1986년 336억 달러로 급신장하였고, 수입은 1966년 6억 8000만 달러에 불과하였으나, 1986년 293억 달러를 기록하였으며, 국제수지는 대체로 적자폭이 심화되고 있었으나, 1986년 흑자를 기록하였다.
외채액은 1966년 4억 달러였으나, 계획을 진행함에 따라 점차 증가하여 1986년에는 445억 달러에 이르고 있어, 자립성장의 필요성은 아직도 해소되지 않고 있다.
이러한 양적인 성장에도 불구하고 경제력이 일부계층에 편중되어 소득분배의 불평등은 심화되었으며, 대외지향적 불균형 개발로 인해 건전한 시장경제의 기능이 위축됨으로써 자원이 효율적으로 배분되지 못하는 결점도 노정하였다. 또한 한국의 5개년계획은 제3차 계획까지는 주로 양적확대를 목표로 하였으므로 분배문제는 제3차 계획부터 중시되기 시작하였다.
제3차 계획에서는 국토종합개발을 통한 지역발전의 균형이란 형태로 형평문제가 부각됨으로써 형평문제가 계획목표에 정식으로 포함된 것은 제4차 계획부터이다. 그러나 제4차 계획에서도 공해방지나 환경보전 등의 문제가 소흘히 다루어졌다. 생활의 질적 향상문제는 체계적으로 다루어지기 시작한 것은 제5차 계획부터이다.
그리고 1980년대에는 자원 및 수출시장의 확보 등과 관련하여 국제협력관계의 중요성이 증대되었으므로 제6차 계획부터는 국제협력증진이 경제의 개방화와 국제화에 따라 중요한 계획목표로 등장하였다. 따라서 제7차 5개년계획에서는 세계화·개방화에 따른 국제경쟁력 제고와 아울러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이 추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