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접통화 자체에 대한 조처이므로 그 목적이나 시행 조처 여하에 따라 국민경제에 큰 영향을 미친다. 우리 나라에서는 1953년 2월과 1962년 6월 두 차례에 걸쳐 통화개혁을 단행하였다.
이는 금본위제도하의 평가절하 또는 화폐 단위의 법정금 평가절하나 화폐마다 액면가치를 법정비율만큼 절하하는 통용가치 절하가 아니라, 호칭가치 절하와 편재과잉 구매력의 일부 봉쇄를 병용한 조처였다.
즉, 이 두 차례의 통화개혁은 인플레이션의 진행으로 인해 팽창된 과잉 통화를 흡수하여 그 이상의 인플레이션 누적을 방지하려는 안정정책인 점에서는 공통되나, 화폐 단위의 절하율과 봉쇄계정의 성질 등에서 큰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
첫째, 제1차 통화개혁 때는 신·구 화폐의 환가비율(換價比率)이 100:1이었으나, 제2차 통화개혁 때의 환가비율은 10:1이었다.
둘째, 신·구 및 재래예금 중 자유계정으로 전환된 부분을 제외한 봉쇄계정의 내용에서 제1차 통화개혁 때 재래금액은 기간 1년의 특별 정기예금으로 되고, 구권 예금계정 중 4분의 1은 기한 3년의 특별 국채예금으로, 나머지 4분의 3은 기한 2년의 특별 정기예금으로 각각 분류 봉쇄한 데 대하여, 제2차 통화개혁에서는 구권과 재래예금의 구별 없이 봉쇄계정으로 전환된 부분은 전액 영구히 동결되어 장기산업개발투자재원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셋째, 제1차 통화개혁은 당시 전쟁중임에도 불구하고 극심한 인플레이션의 억제와 신용 질서 교란요인에 의한 화폐경제체제의 붕괴를 예방함으로써 경제 안정을 꾀하는 데 그 기조를 두었으나, 국회의 봉쇄도완화(封鎖度緩和)로 인플레이션 억제를 위한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제2차 통화개혁은 비교적 안정기조를 지속한 경제정세하에서 인플레이션의 억제보다 장기산업투자재원 조달에 기조를 두고 단행하였다.
그러나 그 취지의 타당성과 시행착오로 유통과정의 경색과 기업 가동률의 저하, 생산 위축 등 경제 각 부문에 큰 충격과 통화가치에 대한 불신 초래 및 계산 단위의 절상 등으로 인한 심리적 영향으로 물가의 자극 원인이 되었다.
제1차 통화금융조치는 1953년 2월 15일 대통령 긴급명령 제13호와 2월 27일의 <긴급금융조치법>에 의거하여 실시되었다. 그 당시는 6·25전쟁으로 인하여 생산활동은 거의 중지상태였고, 거액의 군사비 지출에 의한 통화증발이 계속되어 인플레이션의 압력이 가중되어 가고 있었다.
1953년 휴전의 기운이 감돌아 연합군에 대한 대여 중지와 국제연합한국부흥단(UNKRA)의 부흥계획 착수, 그리고 미국의 경제원조 전망이 호전되고 있었고, 이에 따라 정부와 한국은행은 과잉 구매력을 흡수하고 재정·금융 및 산업활동을 안정통화의 토대 위에 올려 놓는 한편, 채납국세 및 연체대출금의 회수도 아울러 도모한 긴급통화·금융조치를 단행하였다.
이 중 긴급통화조치는 1953년 2월 15일을 기하여 원(圓) 통화의 유통을 정지하고 화폐 단위를 100분의 1로 절하하여 새로운 환(圜)화로 발행하는 한편, 그날부터 2월 25일 사이에 자연인과 법인이 소유하는 원화와 원화표시 지불지시를 금융기관에 예입하게 하고, 2월 14일 전의 금융기관에 대한 일체의 채권·채무도 동시에 신고하게 하였다.
그리고 조치기간중의 생활비에 한하여 1인당 5만 원까지 구화 100원 대 신화 1환으로 교환하고, 그 밖에 일체의 원화예금에 대하여 지불을 금지하였다. 이에 따라 모든 거래 및 원화표시 금전채무는 100:1의 비율로 절하되어 그 단위는 이전의 원에서 환으로 개칭되었다.
제2차 긴급통화금융조치는 1962년 6월 9일자 <긴급통화조치법>, 6월 15일자 <긴급통화조치법> 중 개정 법률 및 6월 16일자 <긴급금융조치법>에 의하여 실시되었다.
제2차 긴급통화금융조치의 배경과 목적을 보면 5·16군사정변 이후 1년간 전례 없이 거액의 통화를 추가 공급한 정부는 그와 같이 누적된 통화량이 활동구매력화 및 투기자금화할 위험성이 있는 한편, 부정 축재자의 정리와 아울러 구 정권하에서 음성적으로 축적 편재된 자금이 은닉되어 있으리라는 판단을 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러한 자금을 장기저축으로 동원하여 장기산업투자재원으로 활용하는 동시에 인플레이션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하여 이 조치는 모든 환통화의 유통과 이에 의한 거래를 일체 금지하고, 화폐 단위를 10분의 1로 절하하여 신 원화로 발행하는 한편, 그날부터 6월 17일 사이에 자연인·법인 또는 임의단체가 소지하는 환화와 환화표시 지불지시를 금융기관에 예입하게 하였다.
그리고 조치기간중의 생활비는 1인당 5,000환까지, 의료비 및 장의비는 5만 환까지, 구화 10환 대신 1원으로 교환하고 그 밖에는 일체의 환화예금에 대하여 지불을 동결시켰다. 이에 따라 모든 거래 및 환화표시 금전채무는 10:1의 비율로 절하되어 그 단위가 환으로부터 원으로 개칭되었다.
그러나 액면 50환 이하의 소액권 및 주화는 당분간 액면가치의 10분의 1에 해당하는 원표시의 은행권 또는 주화로 신권과 병행 운용하도록 하였다. 또 6월 15일 법의 일부 개정에 따라 10만 환 이하의 구권 및 재래예금은 전액 환가비율에 의하여 신권으로 지불하게 되었다.
그 다음 정부는 구매력과 음성 자금의 일부를 봉쇄하기 위한 <긴급금융조치법>을 6월 16일 공포·시행하였으나, 그 뒤 당초 예상과는 달리 금융기관의 공신력을 크게 저하시키는 결과가 되었기 때문에 7월 13일 <긴급금융조치법>에 의한 봉쇄예금에 대한 특별조치법이 공포되어 사실상 봉쇄예금의 동결이 해제됨으로써 통화개혁의 핵심을 이루었던 부동자금의 장기산업투자재원화 과제는 완전히 포기하게 되었다.
그 이유는, 처음 예상과는 달리 부동자금과 대기성예금의 편재는 별로 없었으므로 오히려 금융기관의 공신력을 크게 저하시켰을 뿐만 아니라 경제활동에 혼란을 가져오는 결과를 초래하였기 때문이다.
즉, 정부는 긴급통화조치와 아울러 편재과잉 구매력의 일부를 봉쇄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긴급조치법>을 국회에 제출하여 심의한 뒤 7월 27일 공포, 시행하였다.
이 법은 모든 자연인과 법인의 현금 또는 장부상의 금액표시와 금전계약을 환가비율에 의하여 환화로 환가할 것을 규정하는 것이다.
한편, 구권예금에 대하여 일정한 금액 구분과 체감률을 운용하여 산출한 금액을 지불 기한이 없는 자유계정으로 전환하고, 자유계정으로 전환된 금액을 공제한 잔여 금액 중 4분의 1은 기한 3년의 특별 국채예금계정으로, 나머지 4분의 3은 기한 2년의 특별 정기예금으로 전환 봉쇄하는 등 조처를 취했으나, 봉쇄 목표액인 30억 환은 달성하지 못하고 22억 환에 그치고 말았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금융기관의 융자에 대한 사전 승인제 채택 등 여러 가지 부수적인 조처와 사후 조처에 의해 보완됨으로써 경제기조를 안정화과정으로 전환시키는 데 어느 정도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본래 시도하던 목적은 실패로 돌아갔다고 볼 수 있다.
제1차세계대전 후의 통화조치는 인플레이션 수습 이후 사후정리책으로 단행되었으나 대체로 금본위제도의 복귀와 관련하여 평가절하가 중심 사상을 이루었다.
그러나 특수한 사정에 있었던 일부 국가에서는 통용가치를 절하하였다. 그런데 인플레이션 수습책으로 단행한 제2차세계대전 후의 통화개혁은 통용가치 절하에 주로 의의를 두고 있었고, 일부 국가에서는 예금 봉쇄와 통화에 대한 과세조치도 취하였다.
우리 나라의 두 차례에 걸친 통화개혁은 인플레이션 대책으로 단행한 통화개혁의 범주에 속한다고 하겠으나, 그 목적, 화폐 단위의 절하율, 예금 봉쇄율 등에서는 둘 사이에 적지 않은 차이가 있다.
즉, 제1차 통화개혁 때는 신·구 화폐의 통용가치절하율이 100원 대 1환이었으나, 제2차 통화개혁 때는 10환 대 1원이었다. 제1차 개혁 때는 재래예금과 구권예금을 구분 봉쇄한 데 대하여 제2차개혁 때는 봉쇄계정으로 전환된 예금을 일률적으로 무한정 동결하였던 것이다.
한편, 계획의 목적에 서는 제1차 통화개혁 때는 인플레이션 수습, 제2차 통화개혁 때는 장기산업자금 조달에 두었으므로, 통화개혁의 주요 목적이 주로 전쟁 인플레이션을 수습하는 데 있다고 하나 이의 효과는 정책실시 이후에 달렸다고 하겠다.
그런데 우리 나라에서는 제1차 통화개혁은 그 뒤의 재정·금융이 정책 전과 다름없이 통화증발과 정부대상금(政府貸上金) 및 유엔군대상금을 통하여 공급되었기 때문에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다. 제2차 통화개혁 때는 중도에서 통화조치 자체가 백지화됨으로써 오히려 경제질서 교란과 인플레이션 심리 자극이라는 부작용만 남기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