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례』는 중국 주(周)나라 왕실의 관직 제도와 전국시대 각국의 제도를 기록한 유교 경전이다. 『예기』, 『의례』와 함께 삼례로 일컬어지며, 당나라 이후 13경에 포함되었다. 『주례』에서는 천지 춘하추동에 따라 직제를 크게 천관, 지관, 춘관, 하관, 추관, 동관의 여섯으로 나누었다. 각 편마다 첫머리에 경문(經文)을 두어 해당 관직과 직무의 요점을 총괄 서술하고, 아래에 소속 관직과 직무를 등급에 따라 차례로 배열하였다. 『주례』의 이러한 관직 체계는 후대에 큰 영향을 미쳐서, 한대에 이미 관부를 육조로 나누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주(周) 왕실의 관직 제도와 전국시대(戰國時代) 각 국의 제도를 기록한 책으로, 후대 중국과 우리나라에서 관직 제도의 기준이 되었다. 원래의 이름은 『주관(周官)』 또는 『주관경(周官經)』이었는데 전한(前漢) 말에 이르러 경전에 포함되면서 예경(禮經)에 속한다고 ‘주례’라는 명칭을 얻게 되었다.
『예기(禮記)』 · 『의례(儀禮)』와 함께 삼례(三禮)로 일컬어지며, 당대(唐代) 이후 13경(十三經)의 하나로 포함되었다. 성립 시기에 대해서는 고문학파(古文學派)에서는 주나라 초기 주공(周公)이 지은 것이라 하고, 금문학파(今文學派)에서는 전국시대에 이루어진 것이라 하며, 또 한대(漢代) 유흠(劉歆)의 위작(僞作)이라고 하는 등 많은 논란이 있어 왔다.
그러나 근래에 이르러서는 주 · 진(秦)의 청동기 명문(銘文)의 기록에 의거, 대체로 전국시대에 성립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이 후 후한(後漢)의 정현(鄭玄)이 주석을 붙여 『주례주(周禮注)』를 편찬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당(唐)의 가공언(賈公彦)이 『주례정의(周禮正義)』를 편찬함으로써 13경의 하나로 확정되었다. 이 밖에도 주석본으로 청대(淸代)의 학자 손이양(孫詒讓)이 편찬한 『주례정의』 등이 있다.
이 책의 체재는 천지춘하추동(天地春夏秋冬)의 육상(六象)에 따라 직제를 크게 천관(天官) · 지관(地官) · 춘관(春官) · 하관(夏官) · 추관(秋官) · 동관(冬官)의 여섯으로 나누고 그 아래에 각 관직과 직무를 서술하는 형태로 되어 있다. 이에 따라 전체가 천관총재(天官冢宰) · 지관사도(地官司徒) · 춘관종백(春官宗伯) · 하관사마(夏官司馬) · 추관사구(秋官司寇) · 동관고공기(冬官考工記)의 여섯 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가운데 「고공기」는 유실된 「동관사공(冬官司空)」 대신 한대(漢代)에 보충해 넣은 것이다. 각 편마다 첫머리에 경문(經文)을 두어 해당 관직과 그 관장하는 직무의 요점을 총괄 서술, 그 아래에 관직과 직무를 등급에 따라 차례로 배열하였다.
구체적 내용을 보면, 천관편에 대재(大宰) 이하 63관직, 지관편에 대사도(大司徒) 이하 78관직, 춘관편에 대종백(大宗伯) 이하 69관직, 하관편에 대사마(大司馬) 이하 67관직, 추관편에 대사구(大司寇) 이하 64관직, 동관편에 수인(輸人) 이하 31관직 등 모두 372관직을 망라해 각기 그 직무의 성격과 관장 사항을 서술하고 있다. 이 가운데 관직의 이름만 있고 내용은 유실된 것이 모두 16항목이다.
『주례』의 이러한 관직 체계는 후대의 국가 조직과 관직 제도에 큰 영향을 미쳤으니, 한대에 이미 관부(官府)를 육조(六曹)로 나누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수당(隋唐) 이후로는 중앙 정부로부터 지방에 이르기까지 모든 행정 조직이 이(吏) · 호(戶) · 예(禮) · 병(兵) · 형(刑) · 공(工)의 육부(六府) 혹은 육조의 형태로 정비되었다.
이 책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그 시기를 명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고이왕 때에 중국의 제도를 본떠 대신(大臣)으로 육좌평(六佐平)을 두었다고 하는 기록으로 미루어 볼 때 삼국 시대에 이미 그 영향이 부분적으로나마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후 고려에 들어오면 예종 때에 칠재(七齋)의 하나인 구인재(求仁齋)에서 『시경』 · 『서경』 · 『역경』 · 『예기』 · 『춘추』와 함께 『주례』를 가르쳤다고 하였으니, 고려 중기에는 이미 『주례』가 주요 유교 경전의 하나로서 국가의 공식 교육 기관에서 교육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책이 본격적으로 연구, 인용되기 시작한 것은 성리학의 유입으로 인해 유교 경전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지고 유교 중심의 정치 체제를 구축할 필요성이 강하게 대두된 고려 말기에 이르러서이다. 특히 권근(權近) · 정도전(鄭道傳) 등의 저술에는 『주례』의 구절이 직접 인용되고 있어 이들의 『주례』에 대한 이해가 상당히 깊었음을 말해 주고 있다.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세종 때에 16책의 단행본으로 간행, 일반에 보급되었다.
일반적으로 조선조의 학자들은 경학(經學)보다 성리학에 더욱 관심을 기울였으므로 『주례』와 같은 선진 경전(先秦經典)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가 드물었으나, 조선 후기에 이르러 성리학 일변도의 풍토에서 벗어나 새로운 사상을 모색하려는 경향이 일어나면서 몇몇 학자를 중심으로 『주례』 등의 선진 경전에 대한 활발한 관심과 연구가 이루어졌다.
이 가운데 허목(許穆)과 윤휴(尹鑴)는 각기 『주례』에 관한 저술을 남겼고, 정약용(丁若鏞)은 『춘추고징(春秋考徵)』에서 『주례』를 중심으로 다른 경전의 재해석 · 재구성을 시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