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자수(自修), 호는 독곡(獨谷). 할아버지는 판도총랑(版圖摠郞) 성군미(成君美)이고, 아버지는 부원군 성여완(成汝完)이다. 어머니는 밀직사지신사(密直司知申事) 나천부(羅天富)의 딸이다.
1341년 동정직(同正職)으로 사온서승(司醞署丞)을 받고, 1355년에는 사마시에 제3등으로 합격하였다. 1357년(공민왕 6) 과거에 급제, 국자학유(國子學諭)의 벼슬을 받았다.
승진하여 사관(史官)으로 있을 때, 이제현(李齊賢)이 국사를 편수하면서 재능을 인정하여 성석린에게 항상 글을 짓게 하였다. 이어 예문관(藝文館)의 공봉(供奉), 삼사(三司)의 도사(都事), 전의시(典儀寺)의 주부(注簿) 등을 지냈다.
공민왕도 성석린을 중용하여, 차자방(箚子房: 뒤의 상서원)의 필도치(閟闍赤)로 등용하였다. 다시 전교시부령(典校寺副令)·지인상서(知印尙書)·예부총랑(禮部摠郎) 등을 역임했는데, 신돈(辛旽)의 미움을 사서 외관으로 해주목사가 되었다. 그러나 이내 내직으로 성균관사성(成均館司成)·삼사좌윤(三司左尹)·밀직사좌부대언(密直司左副代言)·지신사(知申事)·제학(提學) 등을 지냈다.
1380년(우왕 6) 여름 왜구가 승천부(昇天府)에 침입하자 원나라 장수 양백연(楊伯淵)이 원수(元帥)가 되고, 성석린은 부장(副將)이 되어 맞아 싸웠다. 여러 장수가 왜적의 기세에 눌려 후퇴하려 하자 성석린이 죽음을 각오하고 싸울 것을 주장하여, 여러 장수가 이에 따라 적을 무찔렀다. 그 해 가을 양백연의 옥사에 연루되어 함안에 유배되었다.
다시 부름을 받아 창원군(昌原君)에 봉해지고 바로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올랐다. 외직으로 양광도도관찰사(楊廣道都觀察使)가 되어 주·군에 의창(義倉)의 설치를 건의했는데, 조정에서 이를 채택하여 모든 도에서 행하도록 하였다. 다시 내직으로 문하부평리(門下府評理)와 대사헌이 되었다. 1390년 지공거(知貢擧)로서 이조(李朝) 등 33인을 선발하였다.
이성계의 역성혁명에 참여하여 단성보절찬화공신(端誠保節贊化功臣)의 녹권(錄券)이 내려지고 창성군 충의군(昌成郡忠義君)에 봉해졌다. 태조가 즉위하자 문하시랑찬성사(門下侍郎贊成事)가 되었고, 1393년(태조 2) 개성부판사(開城府判事)를 거쳤다. 이듬해 한성부판사를 지냈으며, 원종공신이 되어 노비 3인, 토지 30결을 하사받았다.
1398년 문하시랑찬성사·판호조사 등을 역임하였다. 정종이 즉위하자 외직으로 서북면도순찰사(西北面都巡察使)·도절제사(都節制使)·평양부윤을 지내고, 내직으로 문하시랑찬성사가 되었다. 이어서 문하우정승(門下右政丞)에 올랐다가 곧 좌정승이 되었다.
태종이 즉위한 후 좌명공신(佐命功臣)이 되고 창녕부원군(昌寧府院君)에 봉해졌다. 1402년(태종 2) 영의정부사를 거쳐, 이듬해 우의정이 되었다.
그 뒤 1407년에 좌의정을 지냈고, 1411년 사직을 원했으나 허락되지 않아 1414년 부원군으로 휴직하였다. 1415년 영의정이 되었으나 다시 부원군으로 물러나서 쉬니 궤장(几杖)이 하사되었다.
제1차 왕자의 난이 있은 뒤 태조가 함흥으로 행차하여 머물었는데, 태종이 여러 사자를 보냈으나 감히 문안을 전달하지 못하였다. 이에 성석린이 태조의 옛 친구로서 조용히 인륜의 변고를 처리하는 도리를 진술, 비로소 태조와 태종이 화합하게 되었다.
검소한 생활을 즐겼으며, 초서를 잘 쓰고 시를 잘 지었다. 말년에 관직에서 물러나 한가롭게 지내면서, 쉬는 곳에는 항상 나무궤를 놓아두고 앉아 ‘양화(養和)’라고 이름하였다. 시호는 문경(文景)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