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행(行幸)은 동북아시아의 왕조 국가 군주들이 궁궐 외부로 거둥하는 일종의 의례이다. 행행(幸行)이라고도 한다. 유교적 이상사회를 실현하기 위해 유교 국가의 군주가 통치기간 중에 늘 거행하던 정치 행위였다. 국가의 의례적 전범(典範)으로 사직과 종묘의 제사, 능행(陵幸), 원행(園幸), 열무(閱武), 강무(講武), 사냥 등을 거행할 때 시행되었다. 격쟁(擊錚)이라는 행위를 통해 직접 국왕에게 상언(上言)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국왕과 민인 간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장이었기 때문에 국왕이 대외적으로 왕실의 적통성과 권력자로서의 통치권을 확인할 수 있는 의례였다.
행행(行幸)은 전근대 왕조 국가의 의례적(儀禮的) 단어이면서 사회적 파장력을 지녔던 정치적 용어이다. 행행은 전근대 왕조 국가의 군주가 통치기간 중에 늘 거행하던 정치 행위였다. 국왕, 황제, 천황이던 간에 군주라면 언제나 수행해야 했던 의례적(依例的)이면서도 정형화되었던 왕실의 행사이면서 전통적인 국가 전례(典禮)였다.
역사적으로 행행은 동북아시아 왕조 국가들이 건국 초기부터 거행하던 연원이 오래된 의례이다. 그 배경에는 동북아시아 왕조 국가들의 통치 이념 및 구조에서 찾을 수 있다. 동북아시아 고대 왕조는 유교를 국가 통치 이데올로기로 삼았으며, 그를 바탕으로 유교의 이상 사회인 예치 사회(禮治社會)를 건설하는 것에 기본 목표를 두었다. 유교는 그 태생부터 정치 지향적인 사상으로서 사회 구성원의 갈등구조를 정형화하는 것에 주안점을 두었다. 그에 따라 통치자와 피치자에게 사회 구성원으로 존재하는 이유를 의례적 질서 차원에서 설명하고자 하였다. 유교 이념에서 통치는 본질적으로 사회의 도덕적 교육 과정, 즉 군주와 지배층의 도덕적인 모범을 통해 피지배자들의 본성을 사회적, 우주적인 도덕 법칙과 조화시키는 과정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유럽의 왕조 국가에서 법 체제에 따라 피지배자들을 포상과 처벌의 강제적인 수단으로 대하는 것과는 달리 동북아시아에서는 도덕적으로 설복시켜 통치하는 예치 체제를 강조하였다. 그러므로 유교 이념에서 이상적인 통치 구도는 국왕과 관료, 민인간의 관계가 적대적인 갈등구조의 계급관계가 아니라 자연계의 배열과 같이 사회구성원들이 각자의 지위와 신분에 맞추어 생활해가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왕조의 군주를 비롯한 지배층의 지식인들도 유교적 이상사회의 실현을 위해 강제적인 법의 집행이나 처벌이 아니라 국가에 전래되던 의례적 전범(典範)을 사회 구성원이 자발적으로 체득하여 상호 간에 예로써 대하는 것을 지향하고 권장하였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그 사회에 전래되는 의례는 예측이 가능한 사회적 행위로서, 의례의 거행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물론 의례 행위의 영향을 받는 사람들에게 사회 구성원으로서 자신의 위치를 재삼 확인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따라서 고대 동북아시아 군주들이 유교적 의례 체제를 강조한 것은 당연한 결과라고도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유교 의례의 하나가 조선시대 국왕의 행행이었다. 조선시대 국왕은 수시로 궁궐과 도성 밖으로 행행하였다. 국왕들은 건국 초기부터 사직과 종묘의 제사, 능행(陵幸), 원행(園幸), 열무(閱武), 강무(講武), 사냥 등을 거행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행행을 이어 나갔다. 그런데 국왕이 궁궐과 도성을 벗어난다는 것은 왕조국가에서 볼 때 정치, 군사적으로 큰 파장을 야기하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유교적 통치체제에서 국왕은 만인의 아버지였으며, 왕조국가에서 국왕 그 자체가 권력의 상징이었음을 감안할 때 행행은 국가적 이벤트이면서 최대의 관심사가 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조선 후기에는 국왕의 행행이 있을 때마다 관광민인(觀光民人)이 항상 등장하였으며, 이들과 즉석 대화가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영조와 정조는 물론 세도정치기에 이르기까지 국왕의 행행 행렬을 보기 위해 경외의 민인들이 구름처럼 몰려왔다. 행행이 거행되는 날은 국왕의 경호를 위해 도성의 관청 업무가 일시 정지되고 도로의 상업 행위도 금지되어 일종의 공휴일이었다. 따라서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국왕을 만나러 왔으며, 이들은 지붕 위를 시작으로 행차에 방해가 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어디에서든지 자유로운 자세로 행렬을 볼 수 있었다. 동시대의 중국과 일본에서 군주의 행차를 엄숙하고 경직된 자세로 맞이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왕조국가에서 민인이 국왕을 만난다는 것은 물론 일생에 한번 보기도 어려운 사정에서 행행은 국왕의 모습을 직접 근거리에서 볼 수 있는 기회였다. 더욱이 행행 지역의 정치, 사회, 경제적 문제나 개인들의 원소(冤訴)를 격쟁(擊錚)이라는 행위를 통해 직접 국왕에게 상언(上言)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국왕의 입장에서도 관료들을 거치지 않고 직접 민인을 대면하여 그들의 목소리를 듣는 모습을 통해 유교의 이상적 군주상을 표현할 수 있는 장이기도 했다. 이러한 행행을 통해 국왕은 통치권과 정통성을 상징적으로 인정받는 효과를 불러올 수 있었다. 무엇보다 행행은 국왕이 대외적으로 왕실의 적통성과 권력자로서의 통치권을 확인할 수 있는 의례였다.
조선의 국왕들은 누구라도 신체적 문제가 없으면 수시로 행행을 거행하였다. 국왕 개인의 기호에 따라 행행은 다양하였다. 세조가 질환 치료를 위해 온양 등에 온행(溫幸)한 것이나, 연산군이 사냥과 주연(酒筵) 및 행락(行樂) 등을 위해 행행한 것이나, 정조가 효심으로 현륭원에 원행한 것 등은 모두 행행의 범주에 들어간다. 이후 국왕권이 위축되었다고 회자되는 세도정권기에도 국왕의 행행은 지속적으로 거행되었다. 정조가 왕권의 신장을 위해 신설한 화성의 현륭원을 비롯하여 왕실의 선대 능침들에 정기적으로 행행하였다. 조선왕조의 행행은 대한제국기에 이르러 황제국의 변모를 갖출 때도 순행의 형태로 이어졌다. 오히려 순종대에는 기차를 이용하여 의주와 부산에 이르기까지 전국에 걸쳐 순행을 거행하였다. 따라서 행행은 왕조 국가가 존속되면 전례에 따라 계속 시행되던 국왕의 의례적 행사였음을 알 수 있다.
행행은 국왕이 궁궐의 외부로 나가는 것으로 종묘의 제례(祭禮)와 사가(私家)에 방문하는 것에서부터 도성(都城)과 왕토(王土)의 경계까지 그 범위와 사례가 다양하고 광범위하다. 행행의 기원을 고대부터 찾아보면, 동북아시아 역사 기록으로 처음 등장하는 것이 하(夏) · 은(殷) · 주(周) 시대이다. 당시 천자가 제후를 만나러 가는 것을 순수(巡狩)라 하였고, 제후가 천자를 뵈러가는 것을 술직(述職)이라고 하였다. 천자는 5년마다 순수를 하였으며, 제후는 4년마다 술직을 하였다. 순수는 군주가 각 지방의 관리와 민인들을 통제하고 진무(賑撫)하는 목적을 갖고 치른 행사였다.
조선시대에 행행이라는 말의 연원은 백성이 국왕의 행차인 거가(車駕)의 행림(行臨)을 행복(幸福)하게 여긴다는 것이다. 거가가 가는 곳에는 반드시 백성에게 미치는 은택이 있으므로 백성들이 다 이것을 행복하게 여긴다는 의미이다. 예컨대 고려시대에는 예종이 1116년(예종 11) 4월에 “순행하는 의례는 지방 실정을 살피고 교화를 베풀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조선시대에도 정조가 행행하면서 말하길, “이제 내 거가가 이곳에 왔으니, 저 백성이 어찌 바라는 뜻이 없겠는가?”라고 하였듯이 행행의 어원에 내포된 뜻을 분명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조선시대 이전의 행행은 그 명칭이 조금씩 차이를 보이는데, 황제의 위의(威儀)를 갖추는지의 여부에 따라 나타났다. 대체로 삼국시대와 고려시대까지는 행행 용어보다는 황제가 사용하는 순수(巡狩), 순행(巡幸)이 많이 사용되었다. 황제의 행차는 책봉을 받는 국왕과는 차이가 있었다. 행차의 규모부터가 거대했지만, 무엇보다 행렬에 포함되는 의장(儀仗)과 반차(班次)의 내용이 달랐다. 의장은 군주의 위의를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것으로, 기치(旗幟)와 병장기가 대표적이었다. 황제의 의장 중에 대표적으로 상기(象旗)와 오색 용기(五色龍旗)를 들 수 있다. 이 두 기치는 고려시대와 대한제국에서만 나타나고 있다. 명과 청의 책봉을 받았던 조선 국왕의 의장에는 포함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황제 의장 반차의 내용을 제외하면 행행이 지니는 상징과 효과는 큰 차이가 없었다.
한편 고대 동북아시아의 행행 기원과 유래는 오례(五禮)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오례란 왕조국가 군주의 혼례와 장례 등의 각종 행사를 길례(吉禮), 가례(嘉禮), 군례(軍禮), 흉례(凶禮), 빈례(賓禮) 등의 5가지 형태로 구분한 것이다. 이 5가지 구분은 중국 고대 주나라의 의례인 『주례(周禮)』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그런데 오례의 기본적인 내용이 군주가 궁궐 외부로 나가 의례를 주최하는 것이 대부분으로 행행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여지를 제공해주고 있다.
『주례』에 기초한 오례 구조는 후한대에 음양오행(陰陽五行)의 사상적 체계를 완성한 이후에 정착되었다. 이후 『주례』에 기초한 오례는 수와 당대를 거쳐 국가 의례로 정비되었다. 그중 당대의 오례 체계는 『대당개원례(大唐開元禮)』로 재정비되었다. 『대당개원례』는 일반 서민들의 생활을 규제하는 의례 내용은 거의 없을 정도로 왕조 중심 의례이다. 또한 『당육전(唐六典)』의 정리도 『주례』를 체계적으로 계승한다는 취지에서 이루어져 당대에 오례의 기틀이 마련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런 배경으로 인해 행행이 체계적으로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한국사에서도 삼국시대에 오례의 영향에 따라 행행이 의례적으로 정착되었다. 삼국시대의 행행은 『삼국사기(三國史記)』, 광개토왕릉비문과 진흥왕 순수비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삼국사기』에는 총 135회의 행행 기록이 나타나는데, 그 비중은 신라 52회, 고구려 47회, 백제 36회 등이다. 그 중 『삼국사기』의 「 본기」에서 정치기사의 행행만을 정리하면 축성(築城)과 수궁(修宮), 관리 임명, 제사 등의 순서로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삼국시대에는 중원(中原)의 정치적 환경의 변화에 따라 삼국에서 사용하는 의장에 차이가 있었다. 신라의 경우 책봉국의 지위에 맞추어 행행 의례를 거행하려고 하였다. 반면 고구려와 백제는 황제국의 지위에 해당하는 의장을 주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삼국 모두 군주의 행행을 순행 내지는 순수라고 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을 사료에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당시까지는 중원의 왕조와 대등한 관계의 행행 의례를 진행하였다고 추정할 뿐이다. 이점은 고려시대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삼국시대의 행행 체제는 고려에서도 그대로 계승되었다. 고려 왕조의 수립이 폭력적이지 않고 전 왕조들의 체제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배경이 되기도 하였지만, 행행은 오례에서 길례를 중심으로 하는 유교적 국가의례가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고려사(高麗史)』에 실린 오례 관련 의례에서 환구(圜丘), 방택(方澤), 대사(大祀), 중사(中祀), 소사(小祀) 등의 제사에서 행행이 거행되었다. 특히 고려의 군주는 행행의 하나인 도성 내부의 이어(移御)를 통해 왕권의 강화를 도모하기도 하였다. 의종의 경우, 태조의 진전사원(眞殿寺院)이자 연등회가 열리는 봉은사와 부모의 진전사원 및 종묘인 태묘를 정기적으로 방문하였으며 수창궁(壽昌宮), 장원정(長源亭) 등의 별궁과 왕륜사(王輪寺) 등의 호국 사원과 재위 기간 설립한 사찰 등에 자주 행행하였다.
그런데 고려시대 행행은 간과하지 말아야 되는 점이 있다. 『고려사』를 편수한 조선의 지배층에 의해 고려시대 정치적 용어가 사대적 기준에 따라 순화된 것이 많기 때문이다. 따라서 행행 의례도 제후국의 기준에 맞추어 재정비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고려 왕실에서 장기적으로 진행하였던 행행 의례의 사례를 통해 황제국의 체제를 갖추고자 하였음을 볼 수 있다. 예컨대 고려의 군주들은 서경과 남경을 자주 순행하였는데, 태조의 『훈요십조(訓要十條)』에 근거한 것이다.
『훈요십조』에서 태조는 사중월(四仲月)인 2·5·8·11월에 서경으로 행행하도록 하였다. 『예기(禮記)』의 「왕제(王制)」에 천자는 5년에 1번씩 2월에 동쪽, 5월에 남쪽, 8월에 서쪽, 11월에 북쪽으로 순수를 하는 것이 상례였다. 황제는 순수에 임하면서 태산 · 남악 · 서악 · 북악의 산천에 제사를 지내고 제후들의 정치를 살폈다. 따라서 『훈요십조』의 순행 시기와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다.
또한 고려 군주들이 순행 후에 명산대천에 덕호를 내린 것 역시 『예기』의 「왕제」에서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다. 예컨대 숙종은 남경의 삼각산에 행차하였을 때, 명산대천의 신호(神號)에 각각 인성(仁聖) 두 글자를 더하고 그 산천 소재 주현에서 그것을 고하는 제사를 올리도록 하였다. 의종도 남경에 순행시 명산대천에 작호(爵號)를 내렸다. 1167년(의종 21) 의종은 순행을 거행하면서 명산대천의 신에 작호를 더 붙여 주었으며, 개경과 지방의 80세 이상의 노인과 효자 및 절부(節婦) 등에게 물품을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순행 때에 어가를 수행한 자들에게 관직을 더 올려주었다. 이러한 고려시대 국왕들의 순행 패턴은 조선시대에도 그대로 이어진다.
조선시대의 행행은 위와 같은 역사적 기원성을 내포한 채 거행되었다고 볼 수 있다. 조선이 역성혁명으로 전 왕조인 고려를 멸망시켰다고는 하지만 왕조의 의례는 계승하였으며 특히 행행 의례는 전왕조의 체제를 그대로 답습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 점은 『고려사』에 실린 고려의 행행 의장 행렬을 조선과 비교해 보면 확연하게 드러난다. 물론 조선이 명의 책봉을 받는 제후국으로 행행 의례도 그 격에 맞추어 거행되었다. 그러나 행행이 지니는 정치적 상징성과 장기 지속성은 그대로 계승되었던 것이다.
조선 전기 국왕이 종묘를 비롯한 각종 제사에 참여할 때, 동원된 의장과 거행 형태는 유사하거나 거의 동일하게 일치하고 있다. 그리고 『명회전(明會典)』이 조선보다 늦은 1497년 편찬에 착수되어 1502년에 완성된 것도 조선 초기 행행 의례의 정착이 고려의 것을 중심으로 해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짐작하게 하는 부분이다.
따라서 조선시대 행행 의례의 기원은 고려시대는 물론 삼국시대와 당송, 주나라에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으며, 그런 오랜 기간을 통해 정비되고 개선된 의례 형식이 가미되어 조선의 행행이 정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행행은 조선 전기의 법전 정비와 의례서 편찬에 발맞추어 한층 정밀한 국가의례로 자리 잡게 된다.
국왕의 행행은 각 왕조별로 지속되고 계승되었는데, 이는 통시대적인 국가의례의 변화상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 조선시대 사료에서도 국왕의 움직임을 행행으로 통일해서 표현하려던 것을 찾을 수 있다. 예컨대 국왕의 이동을 도성 경계로 할 때, 도성을 벗어나는 경우에만 행행이라고 한다면 일정 부분 맞을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례가 더 많이 나타난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태종이 경복궁 경회루에서 거행한 문무과 복시(覆試)에 친림(親臨)한 것을 행행(幸行)이라고 했으며, 세종이 강무에 참석한 것도 행행이라고 하였다.
조선시대의 행행도 오례를 기준으로 거행되었다. 오례에서 나타나는 행행은 국왕이 길례의 제사, 가례의 혼례, 군례의 대사례(大射禮)와 강무, 빈례의 외교사절 영접, 흉례의 발인과 부묘(祔廟) 등을 주재할 때이다. 오례에서 길례는 국왕의 행행이 대표적으로 나타나는 의례였다. 길례의 행행은 국왕이 사직과 종묘, 문묘, 능침 등에 제사를 거행하기 위해 가는 것이 대부분이었으며, 그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능행이었다. 능행은 다른 행행과 달리 조선 후기로 갈수록 증가되고 변화되는 양상을 보인 행행이었다. 또한 능행은 국왕과 신료, 민인과의 관계를 도성의 내외에서 직접 보여줄 수 있는 국가적 정치행사였다. 조선왕조가 지향한 예치 사회의 구조가 능행의 대열을 통해 대외적으로 드러나는 장이었기 때문이다. 화려한 의장물에 싸인 국왕의 능행 대열은 매번 민인들의 즐거운 관광 대상이 되었으며, 이때의 능행 대열은 국왕을 기점으로 신료와 민인들의 의례적 차등 관계를 분명하게 나타내 주었다.
행행 의례는 조선 후기로 갈수록 반복되고 증가하는 양상을 보여서 민인들이 자연스럽게 통치자의 지배구도인 예치 질서를 받아들이는 결과를 가져왔다. 따라서 유교적 통치 질서 하에서 행행은 수백 년간의 시대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의례적으로 정착하여 정치적으로는 역대 국왕의 권위를 보장해주었으며, 사회적으로는 신료를 비롯한 민인에 이르기까지 의례의 계층적인 질서 체제를 인식하게 하는 매개로 작용하였던 것이다.
한편 오례 체제의 행행 이외에 국왕이 거처하는 궁궐을 옮기는 이어도 행행의 범주에 포함된다. 조선의 국왕들은 신체적인 결함이 있거나 연소한 경우를 제외하고 국왕들은 궁궐 밖으로의 행행을 끊임없이 시도하였으며 거처를 자주 옮기려는 양상을 보였다. 조선 전 · 후기를 막론하고 국왕들은 일상적으로 처리할 업무의 양이 많았으며, 거처하는 궁실로 법궁(法宮)이 존재하였고 신료들도 법궁에 기거할 것을 주장하였음에도 수시로 거처를 옮기고자 하였다. 여름에 더위를 피하기 위한 자연적인 이유에서부터 선대왕이 기거하였거나 대왕대비가 거처하는 곳, 왕족 중에 병에 걸린 자가 있어서 이피(移避)하는 경우가 있었다.
이처럼 국왕이 어느 곳에 장기간 거처하지 않는 양상은 능행과 원행 등에서도 유사하게 나타난다. 오례의(五禮儀)와 법전에 의거해 계절별로 시행되는 능행과 원행 등을 기준으로 본다면, 행행은 법식화(法式化)되고 정례화(定例化)되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매년 반복되고 재현되는 행행이 국왕의 의지에 따라 변형되는 경우가 왕왕 나타났다. 국왕 자신의 병 치료를 위한 온행, 생부와 생모의 묘소에 대한 원행, 자식에 대한 애정으로 결혼한 옹주 집에 가는 사적인 행차 등, 그 이유는 국왕 별로 다양하게 있었다. 따라서 이런 부정기적인 행행으로 인해 기존에 전래되던 행행을 정식화하지 않고 자신이 의도하는 행행을 시행하였다. 국왕은 행행 의례를 통해 자신의 위의를 대내외적으로 드러냈으며, 작게는 왕실 행사였으나 국왕과 신료, 민인과의 관계를 직접 보여줄 수 있는 국가적 정치행사로 이용하였던 것이다.
오늘날에도 사우디아라비아, 스웨덴, 영국, 일본 등의 입헌제 군주 국가에서는 행행 의례가 거행되고 있다. 군주 국가의 역사적 유래에 따라 행행 의례가 계승되었다. 예컨대 일본의 경우, 천황이 선대 능침을 참배하는 것에서부터 국가의 재해 지역을 방문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행차에 사용하는 물질적 요소는 변화되었으나 그 정치적 의미는 크게 변질되지 않았다.
한편 대통령제를 도입한 공화국 정치체제에서도 퍼레이드의 형태로 행행 의례가 일부 흡수된 모습을 볼 수 있지만, 군주 국가의 행행과는 정치 지향점이나 상징물 체제가 상이하므로 근원이 같다고 할 수는 없다.
행행이 조선왕조의 정치적 행위였지만, 그 진행과정은 조선사회의 문화적 현상으로도 볼 수 있다. 한 사회의 문화가 바뀌는 과정은 정치, 경제에서 발생하는 여러 사건들보다 훨씬 속도가 느리고 지속적이다. 따라서 한 사회의 근본적인 개조란 어렵고 드문 일이다. 그런 개조를 위해서는 사회의 공유된 생각인 문화의 폭넓은 변화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행행 의례가 수백 년간 반복되며 지속되어 사회구성원 모두가 그 절차와 내용을 몸에 익숙하게 하고 그 근본원리를 마음에 체득한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특히 행행은 왕실의 행사에만 국한되지 않았고, 국왕과 민인 간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장이었기 때문에 사회적 현상으로도 분석되는 것이다. 국왕이 통치의 중간 단계인 관료들을 통하지 않고 직접 민인을 대면하여 그들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 군주의 통치권과 정통성을 상징적으로 인정받는 효과를 불러올 수 있었다. 따라서 행행은 국왕이 대외적으로 왕실의 적통성과 권력자로서의 통치권을 확인할 수 있는 의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