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흥왕순수비(眞興王巡狩碑)는 삼국시대 신라의 진흥왕이 건립한 4개의 순수비이다. 4개의 순수비는 ‘창녕 신라진흥왕척경비’, ‘서울 북한산 신라진흥왕순수비’, ‘황초령 신라진흥왕순수비’, ‘마운령 신라진흥왕순수비’ 등 4개의 석비를 말한다. 일반적으로 창녕비, 북한산비, 황초령비, 마운령비라 부른다. 진흥왕순수비는 6세기 중반 진흥왕 때의 영토 확장, 중앙과 지방 통치제도, 국왕의 근시 기구, 정치사상 등을 연구하는 데에 귀중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창녕 신라진흥왕척경비(이하 창녕비)는 본래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화왕산에서 뻗어내린 목마산 서쪽 언덕에 있었다. 1914년 일본인 보통학교장의 신고를 계기로 조선총독부에서 조사, 보고하여 세상에 알려졌다. 현재 창녕비는 창녕읍 교상리 28-1번지로 옮겨 비각(碑閣)을 세워 보존하고 있다. 옥개석(屋蓋石)은 만들지 않았고, 받침돌은 현재 존재하지 않는다.
서울 북한산 신라진흥왕순수비(이하 북한산비)는 본래 경기도 고양군 은평면 구기리(지금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구기동) 비봉에 있었으나, 1972년에 국립중앙박물관에 옮겨 보존 전시하고 있다. 조선 후기까지 무왕대사왕심비 또는 몰자비(沒字碑)로 불렸다.
서유구(徐有榘)가 일찍이 비봉에 '신라진흥왕북순비'가 있다고 언급하였고, 김정희(金正喜)와 조인영(趙寅永) 등이 1817년에 비를 탁본하여 진흥왕순수비임을 밝혀내 세상에 알려졌다. 바위를 깎아 받침대로 삼고, 상단에 옥개석을 올려놓는 자리를 만들었으나 옥개석은 발견되지 않았다.
황초령 신라진흥왕순수비(이하 황초령비)는 본래 함경남도 함흥군 하기천면(지금의 북한 함경남도 영광군) 황초령에 있었다. 황초령이 초방원 부근에 있었기 때문에 초방원비라 부르기도 하였다.
한백겸(韓百謙)이 황초령 및 단천에 진흥왕순수비가 있다고 언급하였고, 낭선군 이우(李俁)가 황초령비의 일부를 『대동금석첩(大東金石帖)』에 수록하여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한동안 황초령비의 소재가 알려지지 않았다가 1835년에 함경도 관찰사 권동인이 제1석과 제2석을 다시 발견하였고, 1931년에 엄재춘이 제3석을 재발견하여 제1, 2석과 합쳐 접합하였다.
황초령비는 현재 함경남도 함흥시 사로구역 소나무동의 함흥본궁 안쪽의 정전에 자리한 함흥역사박물관에 마운령 신라진흥왕순수비(이하 마운령비)와 함께 보존, 전시되고 있다.
마운령비는 본래 함경남도 이원군 동면 용산리 사동(지금의 함경남도 이원군 청산리) 만덕산 복흥사의 배후에 솟아 있는 운시산 꼭대기의 마운령에 세웠으나, 후대에 복흥사 위 부락 모퉁이의 약간 평탄한 곳으로 옮겨 별도의 비좌(碑座)를 만들어 세워 두었다고 알려졌다.
최남선(崔南善)이 1929년 함경남도에서 문헌 탐방 여행을 하던 중에 『이성고기(利城古記)』란 책에서 마운령비에 대한 단서를 찾아냈고, 현지답사를 통해 예전에 남이장군비라 불렸던 고비가 마운령비임을 밝혀내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현재 마운령비는 황초령비와 함께 함흥역사박물관에 보존, 전시되고 있다. 비신(碑身)과 별도로 옥개석과 받침대를 만들었다.
창녕비의 재질은 화강암이다. 편평한 거석(巨石)에 표면을 갈고 글을 새겼다. 높이는 가장 높은 부분은 약 300㎝이고, 가장 낮은 부분이 115.1㎝이다. 폭은 가장 넓은 부분이 175.7㎝이고, 두께는 30.3㎝에서 51.5㎝에 이른다. 직선으로 글자를 둘러싸는 선을 그었으나 정연하지 않다. 비의 서체는 예서와 행서의 중간이며, 광개토왕릉비의 서체와 흡사하다.
창녕비 제1행에 신사년(辛巳年)이란 간지가 보여, 561년(진흥왕 22)에 창녕비를 건립하였음을 알 수 있다. 비면(碑面)에 새긴 글자는 모두 27행으로, 1행은 26자 또는 18자이며, 글자의 크기는 3.9㎝이다.
창녕비는 판독이 어려운 부분이 많지만, 내용은 크게 세 단락으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 단락은 제1행 제1자에서 제8자까지로 제기(題記)에 해당한다. 두 번째 단락은 제1행 제11자에서 제11행 제1자까지로 기사(紀事: 사실이나 사적을 기록한 것)에 해당하며, 세 번째 단락은 제11행 제3자에서 제27행 마지막 글자까지로 수가인명(隨駕人名: 진흥왕을 수행한 사람의 명단)을 기록한 부분이다.
기사 단락은 판독이 어려워 전체적인 내용은 파악하기 어렵지만, 대체로 비의 건립 배경, 토지와 하천, 논과 밭 등에 대한 경제 관련 국가 정책이나 어떤 범죄에 대한 처벌 규정 등을 기록한 것으로 이해한다.
북한산비의 재료는 화강암이며, 비신의 높이는 약 155.1㎝, 폭은 71.5㎝, 두께는 약 16.6㎝이다. 비문은 12행으로 각 행 21자 혹은 22자이나 마멸이 심하여 대부분 판독하기 어렵다. 서체는 구양순체(歐陽詢體)라 한다.
앞 부분이 떨어져 나가 건립 연대를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진흥왕(眞興王, 534576, 재위 540576)이 555년(진흥왕 16) 10월에 북한산을 순행한 사실을 주목하여 555년에 북한산비를 건립하였다고 이해하는 견해가 제기되었다.
그러나 『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568년(진흥왕 29) 10월에 북한산주를 폐지하고 남천주를 설치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 사실과 북한산비에 남천군주(南川軍主)가 나오는 사실, 북한산비에 전하는 내부지와 무력지의 관등이 568년 8월에 건립된 황초령비와 마운령비에 보이는 관등과 동일한 점, ‘欲勞賴如有忠信精誠(욕로뢰여유충신정성)’이란 표현이 이들 비에 공통으로 보이는 사실 등을 근거로 568년 말에 건립되었다고 이해하는 견해가 널리 수용되고 있다.
북한산비는 진흥왕이 신료들을 대동하고 북한산을 순수(巡狩)하여 민심을 두루 살피고 백성들을 위로한 사실, 한성(漢城)을 지나다가 석굴에서 도인을 만난 사실, 수가인명 등을 기록한 것으로 이해한다.
황초령비의 재질은 화강암이다. 원석(原石)의 높이는 약 151.5.㎝ 내외이고, 비석의 높이는 전면 130.3㎝, 후면 138.2㎝, 폭은 약 50㎝이며, 두께는 상부 32㎝, 하부 약 24.5㎝이다. 비면에 가로 42.7㎝, 세로 121.2㎝ 정도의 경계선을 긋고, 그 안에 13행을 구획한 다음, 행마다 33자 정도의 글자를 새겨 넣었다. 서체는 구양순체라 한다.
석비 상부의 일부와 좌측부가 깨져 나갔고, 제2석과 제3석을 접합한 부분은 글자가 보이지 않아 판독이 어렵다. 나머지 부분은 모두 판독이 가능하다. 황초령비의 내용은 마운령비와 동일하기 때문에 판독이 되지 않은 부분은 마운령비를 통해 복원할 수 있다.
마운령비의 재질은 화강암이며, 서체는 황초령비와 같다. 비신의 높이가 약 146.9㎝, 폭은 약 44.2㎝, 두께는 약 30㎝이다. 마운령비는 다른 진흥왕순수비와 달리 앞면(양면)과 뒷면(음면)으로 구성되었다. 앞면은 모두 10행으로 1행 26자이며, 뒷면은 모두 8행으로 1행 25자이다.
비문 앞 부분에 태창(太昌) 원년 세차(歲次) 무자(戊子) 8월 21일에 진흥태왕이 마운령을 순수한 사실을 기념하기 위해 돌에 새겼다고 기록하여, 568년(진흥왕 29) 8월 21일 이후에 마운령비를 건립하였음을 알 수 있다.
마운령비 앞면의 내용은 크게 세 단락으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 단락은 제1행 제1자에서 제2행 제2자까지로 제기에 해당한다. 두 번째 단락은 제3행 제1자에서 제9행 제6자까지로 기사에 해당하며, 세 번째 단락은 제10행 제1자에서 제25자까지로 수레를 타고 돌아오는 사실을 기록한 부분이다.
두 번째 단락은 다시 순수의 당위성과 비의 건립 배경을 기록한 부분(제3행 제1자에서 제7행 제7자까지), 민심의 채방(採訪)과 포상 약속을 기록한 부분(제7행 9자에서 제9행 제6자까지)으로 구분할 수 있다. 뒷면은 수가인명을 나열한 것인데, 사문(沙門) 도인(道人)과 대등, 궁중 업무를 담당한 사람, 글을 쓴 사람과 촌주들의 명단을 기록하였다.
진흥왕은 540년 7월 어린 나이에 법흥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라, 법흥왕의 딸이자 진흥왕의 어머니인 지소부인이 섭정하였다. 551년에 개국(開國)이란 연호를 사용하였는데, 이 무렵부터 진흥왕이 전면에 사서 정국을 주도하였다고 이해한다.
신라는 540년대 후반에서 551년 사이에 충주와 청주 지역을 차지하였는데, 진흥왕은 551년(진흥왕 12) 3월에 지금의 충청북도 청주시 또는 충주시에 자리한 낭성(娘城)에 행차하였다. 이후 신료들을 대동하고 새로 개척한 영토를 순수하는 것이 관행화되었다.
신라는 551년에 한강 상류 지역을 차지하고, 553년에 백제가 차지한 한강 하류 지역마저 급습하여 점령하였다. 554년 관산성(지금의 충청북도 옥천군)에서 백제의 침략을 물리치고 한강 유역을 확고하게 확보할 수 있었다. 555년(진흥왕 16) 10월에 진흥왕이 북한산(한강 이북의 서울)을 순행하고 11월에 왕경으로 돌아왔다. 이때 진흥왕은 순행을 통해 새로 개척한 한강 유역을 영역으로 획정하였음을 대내외에 과시하였다고 짐작된다.
창녕비에 의하면, 진흥왕은 561년(진흥왕 22) 2월 1일 갈문왕과 상대등, 대등, 그리고 사방군주(四方軍主) 등을 대동하고 비자벌(지금의 경상남도 창녕군)에 순행하였다고 한다. 사방군주는 지방의 주요 전략 요충지에 주둔한 신라의 핵심 군대인 정군단(停軍團)의 사령관이다.
경상남도 창녕 지역은 6세기 전반 이전에 이미 신라의 영역으로 편제되었기 때문에 진흥왕이 새로 영토로 개척한 지역을 순행한 것으로 보기 어렵다. 창녕비 앞 부분의 마멸이 심하여 진흥왕이 561년 2월 1일에 창녕 지역을 순행한 이유를 정확하게 밝힐 수 없다.
다만 신라가 562년 9월에 대가야를 공격하여 멸망시켰고, 또 『일본서기』에 562년에 임나(가야) 10국을 쳐서 멸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 사실에 의거하건대, 진흥왕이 갈문왕과 상대등을 비롯한 핵심 중앙 관료와 주요 군 지휘관을 대동하고 창녕을 순행한 것은 가야연맹체를 구성하고 있던 여러 나라에 대한 공격과 관련이 깊다고 짐작된다.
『삼국사기』에 556년에 비열홀주(比列忽州)를 설치하고, 성종을 군주로 삼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비열홀(지금의 북한 강원도 안변군 안변읍)에 정군단을 주둔시키고, 그 사령관, 즉 군주로 성종을 임명하였음을 반영한다. 『삼국사기』에는 진흥왕 대에 신라가 안변 북쪽으로 진출하였음을 알려 주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황초령비와 마운령비는 진흥왕이 568년(진흥왕 29) 8월 21일에 황초령과 마운령을 순행하고,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석인데, 두 비에 의거하여 신라가 동북으로 지금의 함경남도 영광군과 이원군 지역까지 진출하였음을 알게 되었다.
마운령비에서 진흥왕이 어가를 돌려 같은 해 10월 2일 비리(非里)에 이르러 변방을 효유(曉諭)하였다고 밝혔다. 비리는 창녕비에 나오는 비리성(碑利城: 비열홀)을 가리킨다. 진흥왕이 8월 21일에 황초령과 마운령을 순행하고, 10월 2일에 비리성으로 돌아왔다고 볼 수 있다. 이후 진흥왕은 추가령구조곡을 거쳐 북한산을 순행하고 북한산비를 건립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진흥왕순수비에 진흥왕을 수행하여 순수에 참여한 인물에 대한 정보를 소상하게 적어 놓았다. 인명은 소속부, 관직, 관등을 모두 밝혀, 6세기 중반 진흥왕 대 중앙과 지방 통치제도를 규명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창녕비에 “대등과 군주 · 당주 · 도사와 바깥의 촌주에게 세심하게 살피게 하였다〔대등여군주당주도사여외촌주심조(大等與軍主幢主道使與外村主審照)〕.”라는 표현이 보인다. 대등은 중앙 관직, 군주와 당주, 도사는 지방 관직, 촌주는 지방의 재지 지배자를 가리킨다. 따라서 이 표현은 561년(진흥왕 22) 당시 중앙과 지방의 모든 관직을 총칭한 것으로 이해한다. 창녕비에 갈문왕과 상대등이 보인다. 그러나 인명을 기록한 부분이 마멸되어 갈문왕과 상대등이 누구인가를 알 수 없다.
진흥왕순수비에 등장하는 인물 가운데 대등 1명과 나부통전(奈夫通典) 관리 1명만이 본피부(本彼部) 소속이고, 나머지는 모두 훼부(喙部) · 사훼부(沙喙部) 소속이었다. 신라가 6세기 전반 법흥왕 대에 연맹체 국가 단계의 통치 체제인 6부 체제를 극복하고 중앙집권적인 국가 체제를 정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진흥왕 대에 관리의 등용 또는 승진 등에서 여전히 소속부를 중시하였음을 반영한다.
진흥왕순수비에 대등(大等) 관직에 임용된 인물이 다수 보인다. 일반적으로 대등은 중요한 국사(國事)를 의결하던 화백의 구성원이고, 상대등은 그것을 주재하던 으뜸 대등으로 이해한다. 대등에는 고위 관등을 가진 인물들이 주로 임명되었다.
그런데 마운령비에 제10등 대나말(大奈末: 대나마), 제11등 나말(나마) 관등으로 대등에 임용된 인물이 나온다. 이들이 비교적 낮은 서열의 관등임에도 불구하고 대등에 임명된 이유는 그들의 신분이 진골이었기 때문이었다고 짐작된다. 진흥왕 대에 관직의 임용에서 관등의 서열보다 신분을 더 중시한 사실을 말해 준다.
창녕비에 ‘~주행사대등’, ‘~군사대등’이 나온다. 품주(집사부)의 차관이 전대등(典大等), 소경의 장관이 사대등(仕大等)이다. 대등 가운데 특정한 직임을 맡은 대등이 존재하였음을 알려 준다. ‘~대등’의 존재는 진흥왕 대에 대등이 국사를 의결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중앙 행정관서가 체계적으로 정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그들이 특정 직무를 맡아 처리하였음을 반영한다.
창녕비에 지방 관리로 군주와 당주, 도사가 나온다. 한때 군주는 주(州), 당주는 군(郡), 도사는 촌(또는 성)에 파견된 지방 관리라고 이해하였다. 그러나 단양 신라 적성비에 물사벌성당주, 추문촌당주가 나와, 이 같은 견해는 잘못임이 입증되었다.
현재 주에 군주, 군의 중심 행정촌(행정성)에 당주나 나두(邏頭), 일반 행정촌에 도사라는 지방 관리를 파견하였다고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행정촌 또는 행정성은 지방의 여러 촌 또는 성 가운데 지방 관리가 파견된 행정 중심 촌 또는 성을 가리키며, 후대에 현으로 재편되었다.
창녕비에 사방군주, 상주행사대등(上州行使大等), 하주행사대등(下州行使大等), 우추실지하서아군사대등(于抽悉支河西阿郡使大等)이 나온다. 사방군주는 상주와 하주, 신주(新州) 및 우추군(지금의 경상북도 울진군), 실지군(지금의 강원도 삼척시), 하서아군(지금의 강원도 강릉시), 그리고 비리군(지금의 북한 강원도 안변)을 포괄한 동해안 지역 등 4개의 광역 단위를 통치하는 군주란 뜻이다.
창녕비에 사방군주는 '비자벌군주, 한성(한강 이북의 서울)군주, 비리성군주, 감문(지금의 경상북도 김천시 개령면)군주’라고 밝혔다. 그런데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흥왕 대 기록에서 비열홀주군주, 감문주군주 등과 같이 ‘~주군주’라고 표현하였다. 또한 신주군주란 표현도 발견된다. 그런데 창녕비에 의하면, 561년 당시 ‘~주군주’란 호칭은 존재하지 않고, 단지 ‘지명+군주’라고 불렀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주(州)와 관련된 『삼국사기』 기록은 믿기 어렵게 된다.
창녕비에 "비자벌정조인(比子伐停助人)"이란 표현이 나온다. 비자벌정은 신라의 핵심 군대로서 비자벌에 주둔한 정군단을 가리킨다. 비자벌정의 사령관이 바로 비자벌군주이다. 한성군주 등도 한성정 등의 사령관이었다. 결국 사방군주는 네 개의 광역 단위를 통치하는 지방 관리이자, 각 광역 단위의 전략 요충지에 주둔한 정군단의 사령관을 겸임하였던 것이다.
이때 비자벌과 감문, 한성은 각기 하주와 상주, 신주의 주치(州治)로 기능하였다. 현재 『삼국사기』 「신라본기 중고기」 기록에 전하는 주의 치폐(置廢) 관련 기사는 주치 및 주치에 주둔한 정군단의 이치(移置) 사실을 반영한다고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상주행사대등, 하주행사대등에서 사대등은 사신(使臣)으로도 표기한다. ‘행(行)은 ‘행동하다’, 또는 ‘움직이다’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따라서 상주 또는 하주행사대등은 중앙에서 상주와 하주에 파견된 대등의 하나로서 한 곳에 상주하지 않고 여기저기 이동하며 어떤 직무를 처리한 관리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중앙에서 광역 단위로 편제한 상주와 하주, 신주를 감찰하고, 각 주의 민생 등의 사정을 파악하거나 또는 군주를 도와 주의 행정과 수취 업무를 보좌하였다고 보고 있다. 우추실지하서아군사대등 역시 동해안 지역을 망라하는 광역 단위에 파견되어 동일한 기능을 수행하였다고 짐작된다. 행사대등과 사대등은 주 또는 동해안 지역에 2명씩 파견되었다.
마운령비에 진흥왕을 따라 순수에 참여한 인물 가운데 왕을 가까이서 보좌하는 다양한 직함이 나온다. 왕의 수레를 잡은 인물〔執駕人〕, 거마(車馬)의 시중을 맡은 약인(𩥩人), 복사(卜師)의 임무를 맡은 점인(占人), 어의(御醫)로 추정되는 약사(藥師) 등이 보인다. 근시 업무(近侍業務)를 수행한 관청으로 추정되는 나부통전(奈夫通典), 급벌참전(及伐斬典)도 나온다.
이 밖에 이내종인(裏內從人), 당래객(堂來客), 이내객(裏內客), 외객(外客)이라 불리는 존재도 발견된다. 이내(裏內)는 고구려의 중리(中裏), 고대 일본의 내리(內裏)와 같은 뜻으로 ‘왕궁 내부’를 지칭한다. 따라서 이내종인은 국왕이 거처하며 일상생활을 하는 침전(寢殿) 또는 국왕의 집무실을 가리키는 편전(便殿) 등에서 국왕을 시종하던 사람들로 짐작해 볼 수 있다.
고구려 모두루묘지에서 ‘객(客)’이 국왕의 신료나 관원을 지칭하는 용례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이내객은 침전이나 편전에서 국왕을 보좌하는 업무를 수행하는 관원들, 당래객은 국왕이 신료들과 함께 국사를 처리하던 정전(正殿) 또는 남당(南堂)에 소속된 관원들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짐작된다. 외객은 지방 통치와 관련된 업무를 보던 하급 관원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도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황초령비와 마운령비에 사문(沙門) 도인(道人), 즉 승려 법장(法藏)과 혜인(慧忍)이 진흥왕을 수행하였다고 하였다. 진흥왕의 본래 이름은 사미(沙彌) 또는 승가(僧伽)를 뜻하는 삼맥종(彡麥宗)이었다. 진흥왕은 말년에 삭발 출가하여 법호를 법운(法雲)이라 지었다. 또한, 진흥왕은 스스로 전륜성왕(轉輪聖王)을 자처하고, 아들의 이름을 전륜성왕 이름을 빌려 동륜(銅輪), 사륜(舍輪: 철륜)이라 지었다.
불교를 독실하게 믿었던 진흥왕은 즉위 이후에 대규모 영토를 확장하면서 자신의 정복 활동을 정당화하고, 동시에 백성들을 무력이 아니라 정법(正法), 즉 불법(佛法)으로 다스리는 이상적인 제왕인 전륜성왕이라 자처하였다고 보인다. 법장과 혜인은 새로운 정복지의 주민들에게 진흥왕이 정법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전륜성왕의 신성한 권위를 갖고 있음을 널리 알리는 종교적 교화의 임무를 수행한 것으로 짐작된다.
황초령비와 마운령비에 『 논어』와 『 서경』에 나오는 구절을 인용하여 진흥왕이 “스스로 몸을 닦아 백성을 편안하게 하려 하였다.”, “위로는 태조의 기틀을 이어 왕위를 계승하여 몸을 삼가고 스스로 조심함으로써 하늘의 도리를 어길까 두려워하였다.”라고 언급하였다.
황초령비와 마운령비에 “하늘의 은혜를 입어 운수를 기록한 것을 보여 주니, 천신과 지신이 모두 그윽하게 감응하여 부명(符命)에 응대하고 이치에 부합할 수 있었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진흥왕이 왕도를 실현할 수 있는 덕을 쌓았기 때문에 천명을 받아 즉위하였다고 자부하고, 백성을 덕으로 교화하여 왕도를 실현하려 하였음을 알려 주는 자료들이다.
『 예기』 「왕제편」에서 제왕이 왕경을 출발하여 산천에 제사를 지내고, 제후를 불러 모아 민심의 동향을 살피며, 역일(曆日)을 제정하고, 금제(禁制)나 예악(禮樂)의 기준 및 제도와 복색(服色)의 규정을 통일시켜 잘못을 바로잡는 것으로 순수를 정의하였다.
따라서 진흥왕의 지방 순수 자체는 유교적인 정치 이념에 입각하여 민심을 수습하고 교화하는 중요한 행위로 규정할 수 있다. 진흥왕은 진흥왕순수비에서 유교적인 정치 이념에 기초하여 국가를 통치하겠다는 의지를 적극 표명하였다고 볼 수 있다.
진흥왕순수비는 단양 신라 적성비와 함께 진흥왕 대 주요 인물들의 동향, 진흥왕의 정복 활동과 영토 확장을 알려 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또한 신라 중고기 6부제와 대등제, 관료제의 운영 실태, 지방 관리와 지방 통치 조직의 운영 양상, 국왕의 근시 기구, 정치사상을 밝히는 주요 자료로서 그 가치가 매우 높다고 평가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