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는 조선후기 『백년록』·『선원록』·『열성어필』 등을 간행한 왕족·서화가·장서가이다. 1637년(인조 15)에 태어나 1693년(숙종 19)에 사망했다. 선조의 손자이며 낭선군에 봉해졌다. 세 차례 사은사로 북경에 다녀왔고, 역대 임금의 필적을 모은 『열성어필』 간행, 어진 제작, 왕실족보 편찬 등 굵직한 왕실 행사를 주관했다. 서예와 금석문에 해박했고, 『관란정석각첩』·『동국명필』·『대동금석서』를 간행하여 우리나라 서예가들의 필적이 전해지는 데 기여했다. 고려~조선 화가들의 그림을 모은 『해동명화첩』을 숙종에게 진상하기도 했다.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석경(碩卿), 호는 관란정(觀瀾亭), 상고재(尙古齋). 선조의 제12남 인흥군(仁興君) 이영(李瑛)의 장남이다. 역대 왕실 및 금석문 자료 편찬, 서화가들의 작품 수습 등 17세기 조선 문화사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이우의 생애 전반에 대해서는 작고하기 전에 저술한 『백년록(百年錄)』(1692)이라는 자서전에 자세히 밝혀져 있다. 1637년 음력 11월 11일 태어나 15세에 낭선군(朗善君)으로 봉해졌다. 1663년, 1671년, 1686년 세 번에 걸쳐 사은사(謝恩使)로 차출되어 북경에 다녀왔고 1665년 현종의 온양 온천 행행(行幸)을 호종하였다. 1674년 효종 비 인선왕후 영릉(寧陵) 조성 후 수릉관(守陵官)을 지냈고 1679~1683년에 『선원록(璿源錄)』 편찬과 봉안(奉安) 업무를 맡았다. 1688년에는 선온(宣醞) 의식을 거행하며 숙종의 명으로 종친을 대표해 시문을 지었다. 자손이 없어 전평군(全坪君) 이곽(李漷)을 양자로 삼았다.
1661년 역대 임금의 필적을 모아 『열성어필(列聖御筆)』을 간행한 것을 시작으로 어진(御眞)과 왕실 족보 편찬 등 종친 신분으로서 굵직한 왕실 행사를 주관하였다. 서예와 금석문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160여 편이 넘는 신도비문 · 묘갈명 · 현판 등을 썼고 1661년 『관란정석각첩(觀瀾亭石刻帖)』, 1664년 『동국명필(東國名筆)』, 1668년 『대동금석서(大東金石書)』를 간행하여 우리나라 서예가들의 필적이 전해지는 데 공헌하였다. 또한 고려~조선 화가들의 그림을 모은 『해동명화첩(海東名畵帖)』을 만들어 숙종에게 진상하기도 하였다.
선조계(宣祖系) 종친들과 허목(許穆) · 송시열(宋時烈) 등 유학자, 조속(趙涑) · 이수장(李壽長) 등 서화가, 고승(高僧)들과 자신이 소장한 서책, 인장, 서화 작품을 열람하며 예술적으로 교류하였다. 서론(書論)의 한 종류인 『임지설림(臨池說林)』을 비롯하여 친족들의 일대기, 와유록(臥遊錄), 연행록을 저술하였다. 작품으로는 왕희지체를 잘 구사한 『준치첩(蹲鴟帖)』(1678), 『임집자성교서(臨集字聖敎序)』 등 서첩이 있고 전국 사찰에 비문이 여러 점 남아 있다.
숭록대부(崇祿大夫),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제수되었고 시호는 효민(孝敏)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