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천안(天安). 자는 인수(仁叟), 호는 정곡(貞谷). 벼슬은 찰방을 지냈다.
숙종 때에 사자관이 되어 어제시(御製詩) 8장(章)을 쓰고 또 금니(金泥)로 종요(鍾繇)·왕희지(王羲之)의 법첩을 임서(臨書)하여 왕으로부터 절찬을 받았으며, 1709년에 온 청나라 사신 연갱요(年羹堯)로부터 동방 제일의 찬사를 받았다고 한다. 1711년 통신사 사자관으로 일본에 가서 명성을 떨치기도 하였다.
글씨는 해서와 행서에 능하였는데, 중국 진대(晋代)의 왕희지(王羲之)의 필법을 익혀 이에 흡사한 글씨를 구사하였는데, 단지 중국에 보내는 문서를 쓸 때에는 그들의 요구에 맞추어 한호(韓濩)풍으로 하였다고 한다. 만년에는 서학(書學)의 원류를 찾아 각종 문헌을 수집, 정리한 『묵지간금(墨池揀金)』을 지어 후학의 지침서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