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유언호(兪彦鎬)는 조선 후기 영·정조 연간의 대표적인 문신으로, 본관은 기계(杞溪), 자는 사경(士京), 호는 칙지헌(則止軒)이다. 1761년(영조 37)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 주로 사간원 및 홍문관의 직책을 역임하였다. 벽파의 일원으로서, 시파인 홍봉한(洪鳳漢) 중심의 척신정치를 타파하고자 하는 신념을 가진 모임인 청명류(淸名流) 사건에 연루되어 1772년(영조 48) 흑산도로 유배되었다. 정조가 왕세손이었을 때 지극히 보살펴 등극 후에는 극진한 예우를 받았다.
이 초상화는 상단의 왼편에 작은 글씨로 “崇禎三丁未 畵官 李命基 寫(숭정삼정미 화관 이명기 사)”라고 쓴 글이 있어 1787년(정조 11)에 도화서 화원 이명기(李命基)가 그린 작품임을 알 수 있다. 정조는 이 그림을 보고 화면 윗부분에 어평(御評)을 남겼는데, “우리가 서로 만나는 것은 먼저 꿈속에서 점지되었지(相見于离, 先卜於夢), 팽팽한 활시위 하나 다듬은 가죽 하나로 내게 최선과 차선을 가르쳐주었네(一弦一韋, 示此伯仲)”라고 하여 유언호의 노련하고 강직한 성품을 활과 가죽에 비유하여 세손 시절 곁에서 자신을 성심껏 보필한 노신(老臣)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었다.
〈유언호 초상〉은 오사모에 운학문 흉배가 부착된 현록색 단령을 입고 서대를 두른 전신 입상이다. 입상의 세로와 가로 98.9×56cm 높이를 보면 관복정장의 의좌상椅坐像이 대체로 150cm 이상인 데 비해서 유난히 작게 묘사되어 있다.
화면 속의 유언호는 오사모에 단령포를 입고 오른손으로 왼쪽 옷자락 끝을 살짝 잡고 서 있는 모습이다. 조선시대 초상화 중 이처럼 관복 정장의 전면입상 초상화는 매우 드문 사례에 속한다. 그러나 정면입상본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1796년(정조 20) 이명기가 그린 또 다른 작품인 「서직수 초상」(김홍도와 합작)과 구도면에서 상통된 점을 찾아 볼 수 있다.
이 초상화는 이명기의 다른 초상화와 마찬가지로 얼굴 안면에는 피부가 얽은 자국과 육리문(肉理紋)이 뚜렷하게 표현되었고 의복의 겹쳐진 부분마다 음영이 더해져 전체적으로 입체감이 두드러진다. 바닥에 깔린 돗자리 위에 가지런히 벌린 두 발 사이에도 그림자가 은은하게 표현되어 화면에 공간감을 불어넣어주고 있다. 그림 아래 부분에 “容體長闊 視元身減一半(용체장활 시원신감일반)”, 즉 “얼굴과 신장, 폭은 원래 신장과 비교할 때 절반으로 줄인 것이다.”라고 쓰여 있어 유언호의 실제 신장 크기를 화면의 비율에 맞춰 축적으로 계산하여 그렸음을 알 수 있다.
이 초상화는 그 예가 희귀한 관복본 전면입상이고, 실제 크기를 절반으로 줄인 모습이라는 점에서 특이한 사례로 주목된다.
조선 후기 화원 이명기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조선 후기의 과학적인 초상화 제작기법을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