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원빈(元嬪)이고 호는 석농(石農)이 가장 잘 알려져 있지만, 그 외 석농보객(石農甫客), 동해만사(東海漫士), 기옹(崎翁), 원객(園客) 등을 사용하였다.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중인 서화 수집가이자 비평가로, 신분을 초월한 교유와 동서양 그림에 대한 방대한 수집을 통해 조선 후기 서화계 및 후대의 작품 보전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김광국은 졸년(卒年)이 한동안 미상으로 남아 있었으나, 최근 『태의원선생안(太醫院先生案)』(19세기)을 통해 71세 되던 해인 1797년 음력 8월 2일에 사망한 사실이 밝혀졌다. 집안은 조선 중기까지 양반층이었으나 5대조 김경화(金慶華)가 의과에 입격하면서 중인 신분으로 하향하였다. 손자 김시인(金蓍仁)에 이르기까지 7대에 걸쳐 의관직을 세습하였고, 김광국 이후 서화 애호 분위기도 함께 전승되어 후손들도 이 분야에 자취를 남겼다. 21세 때인 1747년 의과에 입격하고 1749년부터 내의원에서 정식으로 근무하였다. 이후 실력을 인정받아 어의(御醫) 반열 중 으뜸인 수의(首醫)를 역임하였고 공로를 인정받아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1776년 북경 사행 당시 우황을 사무역한 사실이 발각되어 의적(醫籍)에서 제명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하였다. 처가는 화원 집안으로 유명한 인동 장씨(仁同張氏)였고 슬하에 4남 3녀를 두었다. 특히 장남 김종건(金宗建)은 부친의 서화 수집 활동을 적극 도왔으며, 수장품을 정리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묘소는 선산인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일원에 있었으나, 지금은 재개발된 상태이다.
김광국은 이미 10대였을 때부터 고서화에 관심을 두고 김광수(金光遂), 심사정(沈師正) 등 당대 저명한 수장가, 서화가들과 교유하였다. 양반가 중 유한준(兪漢雋)과 유만주(兪晩柱), 유한지(兪漢芝) 등 기계 유씨(杞溪兪氏) 집안 인물들과 친분이 두터워, 이들과 함께 자신이 수집한 서화 작품을 감상하고 서발문(序跋文)을 받기도 하였다. 또한 정충엽(鄭忠燁), 이인상(李麟祥), 김응환(金應煥), 김용행(金龍行) 등 화가들뿐 아니라 표구사였던 방효능(方幼能), 시인 홍신유(洪愼猷) 등 중인 및 여항인들과도 폭넓게 교유하였다. 친분이 있던 이들 주변 인물들을 통해 나름대로 감식안을 키우고 작품도 직간접적으로 구한 것으로 보인다.
북경 연행과 서화가들과의 교류, 골동 시장을 통해 우리나라 역대 그림과 중국·일본화, 서양 동판화, 지도 등을 다양하게 수집하였고, 석봉 한호(石峯韓濩)의 서첩인 『석봉진적(石峯眞蹟)』과 신라시대 서예가 김생(金生)의 글씨인 「태자사낭공대사비(太子寺朗空大師碑)」의 탁본 등 서예 작품도 두루 모았다. 수집한 작품에 대해서는 나름의 비평가적인 식견을 담은 평가를 남겼고 촌평(寸評)은 아들 김종건을 비롯해 유한지, 이한진(李漢鎭) 등 유명 서예가들에게 대필시켜 동시대인들의 그림과 글씨를 고루 갖춘 격식 있는 화첩으로 꾸몄다. 말년에 평생 모은 서화 작품을 정리하여 『석농화원(石農畵苑)』, 『화원별집(畵苑別集)』, 『화원속첩(畵苑續帖)』으로 만들었다. 유한준은 『석농화원』의 발문에서 김광국을 두고 진실로 그림을 사랑하는 자라고 극찬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