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성왕 ()

고대사
인물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제46대 왕.
이칭
성명
김경응(金慶膺)
시호
문성(文聖)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미상
사망 연도
857년
주요 관직
통일신라 제46대 왕
내용 요약

문성왕은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재46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839~857년이다. 장보고의 반란을 진압하고, 균정계와 헌정계의 화합을 꾀해 정국 주도권을 장악하려 하였다. 중국으로 향하는 해상교통로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강화도에 혈구진을 설치하였다.

정의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제46대 왕.
가계 및 인적 사항

성은 김씨, 이름은 경응(慶膺)이다. 할아버지는 김균정(金均貞)이고, 아버지는 제45대 신무왕이다. 어머니는 정계태후(貞繼太后)인데, 정종태후(貞從 또는 定宗太后)라고도 한다. 선비(先妃)는 박씨이고, 차비(次妃)는 김양(金陽)의 딸이다. 선비의 가계는 전해지지 않는다. 『삼국유사』에는 문성왕비가 소명왕후(炤明王后)라 기록되어 있는데, 선비와 차비 가운데 누구를 가리키는지 알 수 없다.

주요 활동

신무왕은 청해진대사(淸海鎭大使) 장보고(張保皐)와 태종 무열왕계인 김양 등의 도움을 받아 민애왕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재위한 지 얼마되지 않은 839년 7월 23일에 사망하였다. 문성왕은 즉위하자마자, 장보고를 진해장군(鎭海將軍)으로 삼고, 아울러 관복(官服)으로 짐작되는 장복(章服)을 내려주었다. 이는 문성왕이 장보고에게 국왕의 허가를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대외교섭을 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였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신무왕이 예전에 장보고에게 도움을 요청하며 혼인하기로 약속하였다. 문성왕이 장보고의 딸을 맞아들여 둘째 왕비로 삼으려 하자, 조정의 신료들이 장보고의 출신이 미천하다며 반대하였다. 이에 장보고가 반란을 일으켰는데, 염장(閻長)에게 살해되었다.

장보고가 반란을 일으킨 시기에 대해 『삼국사기』는 846년(문성왕 8)으로 기록하고 있다. 신라 정부는 851년(문성왕 13) 2월에 청해진을 아주 폐지하고, 거기에 거주하던 주민들을 벽골군(碧骨郡, 지금의 전라북도 김제시)으로 이주시켰다.

841년 봄에 일길찬 홍필(弘弼), 847년(문성왕 9) 5월에 이찬 양순(良順)과 파진찬 흥종(興宗), 849년(문성왕 11) 9월에 이찬 김식(金式)대흔(大昕) 등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되었다. 양순은 신무왕의 즉위에 공을 세운 인물이다. 대흔은 민애왕 편에서 김양이 이끈 군대에 맞섰다가 패한 인물이다. 이는 문성왕이 즉위한 이후 민애왕의 측근을 사면하였음을 반영한다. 김양이 자신의 딸을 둘째 왕비로 들여 정국을 주도하자, 이에 맞서 양순과 대흔 등이 반역을 꾀한 것으로 짐작된다.

문성왕은 장인인 김양을 견제하기 위해 삼촌 의정(義正 또는 誼靖)을 상대등으로 삼고, 매부 계명(啓明)을 집사부 시중에 등용하였다. 계명은 문성왕의 할아버지 균정(均貞)과 형제 사이인 헌정(憲貞)의 손자이자 희강왕의 아들이었다. 균정은 조카 희강왕과 왕위계승 분쟁을 벌여 패배하여 죽임을 당하였는데, 문성왕이 균정계와 헌정계의 화합을 꾀해 정국 운영의 주도권을 장악하려 하였음을 말해준다.

문성왕의 재위 기간 동안에 전염병이 창궐하고, 한해(旱害)와 수해(水害), 주1, 상해(霜害) 등이 잇따랐다. 문성왕은 죄수를 사면하거나 지방에 사자를 파견하여 백성을 위무하는 등 민심 수습을 위해 노력하였으나, 농민들의 경제생활 안정을 위한 적극적인 정책을 추진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계가 있었다.

844년(문성왕 6) 8월에 신라의 관문인 당은포(당항진: 경기도 화성시 남양만)에서 중국으로 향하는 해상교통로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강화도에 혈구진(穴口鎭)을 설치하였다. 강화도는 당은포에서 중국을 잇는 서해 중부 횡단항로 또는 북부 연안항로에 위치한 교통의 요지였다.

851년(문성왕 13)에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아찬 원홍(元弘)이 불경과 부처의 치아를 가지고 돌아오자, 왕이 직접 교외에 나가 맞이하였다. 855년(문성왕 17)에 문성왕은 현세와 내세에서의 공덕을 쌓기 위하여 창림사(昌林寺) 무구정탑(無垢淨塔)을 조성하였다.

문성왕에게 태자가 있었으나 852년(문성왕 14) 11월에 죽었다. 문성왕은 삼촌 의정이 왕위를 잇도록 유언하였다. 문성왕이 857년 9월에 사망하자, 공작지(孔雀趾)에 장사지냈다.

참고문헌

원전

『삼국사기』
『삼국유사』

단행본

김창겸, 『신라 하대 국왕과 정치사』(온샘, 2018)
권영오, 『신라하대정치사연구』(혜안, 2010)
김창겸, 『신라하대 왕위계승 연구』(경인문화사, 2003)

논문

김창겸, 「왕위쟁탈전의 전개」(『신라 왕권의 쇠퇴와 지배체제의 동요』, 신라 천년의 역사와 문화 연구총서 07, 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 2016)
고경석, 「청해진 장보고세력 연구」(서울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2006)
윤병희, 「신라하대 균정계의 왕위계승과 김양」(『역사학보』 96, 역사학회, 1982)
이기동, 「신라하대의 왕위계승과 정치과정」(『역사학보』 80, 역사학회, 1980)
주석
주1

메뚜깃과의 곤충인 풀무치 떼가 날아와 농작물을 남김없이 먹어 버리는 큰 재해.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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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전덕재(단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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