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보고는 남북국시대 청해진을 설치하여 당나라와 신라, 일본 간 해상무역을 주도한 상인이다. 출생일은 미상이며 846년(문성왕 8)에 사망했다. 청년기에 당에서 군사 및 해상무역에 대한 경험을 쌓았다. 828년 완도에 청해진을 건설하고 남해 해상권을 장악하여 당·신라·일본을 잇는 국제무역을 주도했다. 산동성 적산촌에 법화원을 건립하고 후원했다. 강력한 군대와 많은 선박을 보유하고 부를 축적해 거대한 지방세력으로 성장했다. 왕위계승분쟁이 치열하던 시기에 신무왕 즉위에 관여했고 이후 중앙정부와 반목하다가 옛 부하 염장에게 암살당했다.
장보고(張寶高)라고도 한다. 본명은 궁복(弓福) 또는 궁파(弓巴)로, ‘활보’, 즉 ‘활 잘 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지체가 변변하지 못한 평민 출신으로 여겨진다. 장보고라는 이름은 중국 당나라에 건너가 대성(大姓)인 장씨(張氏)를 모방해 지은 것이다.
어려서부터 무예에 뛰어났고 물에 익숙하였다. 청년기에 친구 정년(鄭年)과 함께 당나라에 건너가 생활하다가, 서주(徐州) 무령군(武寧軍)에 복무해 장교가 되었다. 당시 당나라는 각지에 절도사(節度使)들이 할거하고 있었다. 이 시기에 장보고는 그러한 지방군벌의 속성과 그들의 군대양성 방법을 익혔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중국의 동해안 지역에는, 남으로는 양자강 하구 주변에서 북으로는 산동성(山東省)등주(登州)까지 많은 신라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그들 중에는 연안 운송업과 상업에 종사하는 자들도 있었고, 양주(揚州) · 소주(蘇州) · 명주(明州) 등지에서 아라비아 · 페르시아 상인과 교역하는 한편, 중국과 신라 · 일본을 내왕하며 국제무역에 종사하던 자들도 많았다.
해안지역 출신으로 바다에 익숙했던 장보고는 이러한 해상무역에 대해 깊은 인상을 받았으며 더불어 이해하게 되었다. 한편 그 무렵 당나라나 신라 모두 중앙 집권력이 느슨해져 흉년과 기근이 들면 각지에서 도적이 횡행하였고, 바다에서도 해적이 신라 해안에 출몰해 많은 주민들을 잡아가서 중국에 노예로 팔았으며 무역선도 해적의 위협을 받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장보고는 해적들이 신라인을 잡아가는 것에 대해 분노했고, 국제무역에 대한 강렬한 욕망을 가졌으며, 스스로 해상권을 통괄해 독자적인 세력을 키워볼 야망을 불태웠다. 그러던 그가 중국에서 크게 입신하지 못하자 마침내 828년(흥덕왕 3) 귀국하였다.
장보고는 왕에게 남해의 해상교통의 요지인 완도에 해군기지를 건설해 황해의 무역로를 보호하고 해적을 근절시킬 것을 주청하였다. 그러나 당시 신라에는 진골귀족간의 대립이 심한 데다, 귀족 연립정권적인 성격을 띤 중앙정부는 거기에까지 적극적인 힘을 뻗칠 여력이 없었다.
이에 그는 왕의 승인을 받고 지방민을 규합해 일종의 민군(民軍) 조직으로 1만여 명의 군대를 확보해 완도에 청해진(淸海鎭)을 건설하였다. 청해진은 건설될 때부터 장보고를 중심으로 독자적인 세력의 성격을 띠었던 것이다. 그에게 내려진 청해진대사(淸海鎭大使)라는 벼슬도 신라의 관직 체계에는 없는 별도의 직함이었던 점도 이러한 사실을 증명해준다.
청해진을 건설한 뒤, 곧 해적을 소탕해 남해 일대의 해상권을 장악했는데, 이 해상권을 토대로 당 · 신라 · 일본을 잇는 국제무역을 주도하였다. 8세기 중엽 이후 신라 무역상들이 취급한 물품은 752년 일본이 신라 상인으로부터 매입한 물품목록에서 그 일면을 찾아볼 수 있다.
여기에는 구리 거울 등의 금속제품과 화전(花氈) 등의 모직물 같은 신라산 물품과 향료 · 염료 · 안료 등을 비롯한 당 및 당을 중계지로 한 동남아시아와 서아시아 방면의 물품이 적혀 있다. 신라상인은 그 대가로 풀솜[綿]과 비단[絹] 등을 가져갔다.
당나라와의 교역에서도 삼국통일 전에는 주로 토산품이 수출되었으나, 통일 이후에는 고급 직물과 비단 및 금은 세공품이 수출되었다. 또한 당시 신라 귀족들이 애용했던 향료 등의 동남아시아 및 서남아시아산 물품들도 신라 상인의 중계무역으로 수입된 것이다. 장보고의 무역선도 대체로 이러한 물품들과 피혁제품 · 문방구류들을 취급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장보고는 무역 활동과 함께 외교 교섭까지 시도하였다. 840년(문성왕 2)에 무역선과 함께 회역사(廻易使)를 파견해 일본 조정에 서신과 공물을 보냈다. 이러한 시도는 일본측의 국제관례에 따라 거부되었지만 무역은 계속되었다. 또한 당나라에는 견당매물사(遣唐賣物使)의 인솔하에 교관선(交關船)을 보내어 교역을 활발히 하였다. 회역사와 견당매물사의 칭호가 붙은 교역사절을 파견했다는 사실은 그가 일반 무역상인과는 달리 독자적인 세력집단을 형성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한편 일본의 지방관과 승려 엔닌(圓仁)이 장보고에게 서신을 보내어 그의 귀국을 보살펴줄 것을 탄원했다는 것은 일본 · 신라 · 당을 잇는 당대의 해상교통로에서 그의 위세가 국제적으로 인정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는 산동성 문등현(文登縣) 적산촌(赤山村)에 법화원(法華院)을 건립하고 이를 지원하였다. 이 법화원은 상주하는 승려가 30여 명이 되며, 연간 500석을 추수하는 장전(莊田)을 가지고 있었다. 이 지역 신라인의 정신적인 중심지로서 법회 때에는 한꺼번에 250여 명이 참석했던 적도 있었다. 이처럼 장보고의 세력이 중국 동해안의 신라인 사회에도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다.
또한 그 자신이 미천한 신분 출신이었으므로, 골품제와 같은 기존의 신분제에 구애됨이 없이 유능한 인재들을 널리 받아들여 그들의 능력을 적극 발휘할 수 있게 하였다. 816년(헌덕왕 8) 흉년이 들자 170여 명의 굶주린 자들이 바다 건너 중국의 저장(浙江)지역에 먹을 것을 구하러 갔으며, 이 무렵 일본에 300여 명이 건너갔다.
이와 같은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사회분화의 진전과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느슨해지면서 흉년이라도 들면 많은 빈민들이 삶을 찾아 바다로 나가거나 떠돌아다녔다. 장보고는 이러한 빈민들을 규합하고, 새로운 활동무대를 찾아 모여든 인재들을 포용한 것이다.
8세기 이래로 왕성했던 신라인의 해상 활동 능력을 적극 활용해 이들을 묶어 조직화했는데, 이로써 그의 세력이 급속도로 성장하는 토대가 마련된 것이다. 이후 강력한 군대와 많은 선박을 보유하고 부를 축적해 하나의 큰 지방세력으로 성장하였다. 그리하여 중앙정부의 정치적 분쟁에도 자연히 관여하게 되었다.
836년(흥덕왕 11) 수도에서 왕위계승분쟁에 패배한 김우징(金祐徵 : 뒤의 신무왕) 일파가 청해진으로 피난 와서 그에게 의탁하였다. 838년(희강왕 3) 수도에서 다시 왕위를 둘러싼 분쟁이 터져 희강왕이 피살되고, 민애왕이 즉위하였다. 이 정변을 틈타 장보고는 군대를 경주에 보내 반격하며 김우징 일파를 강력히 지원하였다. 그리하여 김우징이 왕으로 즉위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신무왕은 그를 감의군사(感義軍使)로 삼는 동시에 식실봉 이천호(食實封二千戶)를 봉했고, 그의 세력은 중앙정부를 위협할 정도가 되었다. 이에 두려움을 느낀 중앙귀족들은 그의 딸을 문성왕의 왕비로 맞아들이는 것을 반대하였다.
그 뒤 청해진과 중앙정부 사이에는 대립과 반목이 심화되었다. 그러자 중앙정부에서 한때 장보고의 부하였던 염장(閻長)을 보내 그를 암살시켰다. 장보고가 죽은 뒤 그의 아들과 부장 이창진(李昌珍)에 의해 청해진 세력은 얼마간 유지되었다. 일본에 무역선과 회역사를 보내어 교역을 계속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곧 이어 염장을 비롯한 중앙군의 토벌을 받아 청해진은 완전 궤멸되었다. 851년(문성왕 13) 청해진의 주민을 벽골군(碧骨郡 : 지금의 전북특별자치도 김제시)에 이주시키고, 청해진을 없애버렸다.
장보고는 불의에 피살되었으나, 그는 8세기 후반 이후 신라인의 해상활동의 한 정점이 되었다. 또한 신라 말기 각지에서 등장하는 호족세력의 선구적 존재이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