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험성(王險城)’이라고도 표기하였다. 《삼국유사》 고조선조에는 《위서 魏書》를 인용해 단군왕검(檀君王儉)이 아사달(阿斯達)에 도읍을 정했다고 하면서, 또 《고기 古記》를 인용해 단군왕검이 평양성에 도읍을 정했다고 하였다.
그리고 《삼국사기》 권17 동천왕 21년조에는 “평양성은 본래 선인 왕검의 택이다. 또는 왕의 도읍을 왕험이라 한다(平壤城 本仙人王儉之宅也 或云 王之都王險).”라고 하였다.
한편 중국 사서인 《사기 史記》 조선전에는 공손수(公孫遂)의 군대와 좌장군(左將軍)의 군대가 왕험성을 공격하자 조선의 신하들이 투항하고 조선 왕 우거(右渠)가 피살되었으나, 왕험성은 성기(成己)가 일시나마 완강히 항거했다고 하였다.
왕검성이라는 용어는 왕검을 임금이라는 말로 해석해 ‘임금의 성’이라는 뜻의 일반 명사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왕검성을 특수한 지역을 가리키는 고유 명사로 볼 때, 그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우선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에 근거해 평양 지방에 있었다는 견해가 있고, 《사기색은 史記索隱》에서 왕험성에 관한 “요동군(遼東郡) 험독현(險瀆縣)은 조선 왕의 옛 도읍이다.”라는 후한 응소(應邵)의 주를 인용해 요동군의 속현인 ‘險瀆’을 조선계 지명인 ‘검터’의 한자어 표기 ‘儉瀆’으로 이해하고, 이를 《사기》의 왕험성(왕검성)으로 비정해 고조선과 위만조선의 도읍이 계속 요동에 있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또 험독은 중국계 지명이 아니라 고조선의 도읍을 가리키는 조선계 지명이며, 고조선의 도읍이 요동의 험독에서 평양의 험독으로 옮겨졌다는 견해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