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오리 산성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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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천 농오리산성 전경
태천 농오리산성 전경
건축
유적
북한 평안북도 태천군에 있는 삼국시대 고구려의 석축 성곽. 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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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북한 평안북도 태천군에 있는 삼국시대 고구려의 석축 성곽. 산성.
내용

현재 문지(門址)·암문(暗門)·수구문(水口門)·장대지(將臺址)·옹성(甕城)·봉수지(烽燧址)·각루지(角樓址) 등의 시설이 남아 있다.

성안에서 발견된 성석(城石)에는 ‘乙亥年八月前部尖使者於九晏冶城六百八十四間(을해년8월전부첨사자어구안야성684간)’이라는 예서체의 석각(石刻)이 있어서 축성자와 성곽의 규모·축성연대를 짐작할 수 있는데, 여기의 을해년은 435년(장수왕 23)·495년(문자왕 4)·555년(양원왕 11) 등으로 추정된다.

『여지도서』에는 “현 서쪽 15리에 위치한다. 석축으로 성의 둘레는 4,369척이며 옛날 여장(女將) 막덕(莫德)이 쌓았다고 하며 이 성의 성석각(城石刻)은 막덕이 쓴 것이라 한다.”고 되어 있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성의 둘레는 4,369척, 성안에 샘이 세 곳 있고 속칭 고성(姑城)이라 한다.”라고 되어 있어 성의 둘레가 4,369척이며 고성으로도 불렸음을 알 수 있다.

이 성은 산꼭대기를 둘러싼 삼각형 형태로서 사각추(四角錐) 모양의 화강암석재로 축조하였다. 문지는 남벽에 1개, 서벽에 2개, 동벽에 2개가 있는데 동벽 북쪽 끝에 있는 문지는 암문지로 보인다.

문의 너비는 1.7m, 높이는 2m 정도 된다. 문 좌우의 성벽은 높이 1.7m 정도에서부터 호선을 그리며 안으로 구부러져 있는데, 성벽이 무너진 탓으로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으나, 이것은 홍예식(虹蜺式)이었다는 것을 짐작하게 하는 귀중한 자료이다.

수구문은 성의 정문인 남문 부근에 설치되어 있고 정문인 남문지 밖에는 반원형의 옹성이 설치되어 있는데, 이는 ㄷ자형 등 네모난 형태를 가진 오녀산성(五女山城)이나 위나암성(尉那巖城)의 옹성(甕城)에서 발전한 형식으로 보인다.

각루지는 산의 능선을 따라 동서로 길게 뻗은 동서벽 끝에 있는데, 산의 능선이 각각 성 밖으로 연장되었기 때문에 능선을 따라 성벽을 길게 쌓은 끝에 축대를 쌓고 각루를 세웠다.

장대는 북벽에서 10m 가량 떨어진 산마루에 설치한 듯한데 이곳에 서면 성의 형세를 한눈에 볼 수가 있다. 이곳에는 너비 4m, 길이 8m 되는 집터가 있고, 지름이 1m나 되는 주춧돌과 고구려시대의 기와조각이 발견되고 있는데, 돌로 축대를 쌓고 그 위에 기와집의 장대를 지었던 것 같다. 한편, 이 산성 남문의 서쪽 산마루의 성벽 안쪽에 돌로 쌓은 네모난 시설물이 있는데, 그 위에서 많은 숯덩이가 출토된 것으로 보아 봉수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 산성에는 겹성이 축조되어 있는데, 겹성이란 기본성 밖의 자연지세를 이용하여 일부 구간에만 성벽을 쌓거나 또는 보루(堡壘)를 설치하여 그것이 기본성을 밖으로 겹싸도록 축성한 시설물로서, 성벽 축조 때 많은 노동력을 덜면서도 성의 방어력을 높이게 하는 축성방법으로 고구려시대부터 사용되었다.

참고문헌

『세종실록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여지도서(輿地圖書)』
『조선고고학개요』(사회과학원고고학연구소, 1977)
「삼국시대성곽연구」(이원근, 단국대학교박사학위논문,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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