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레 약 7,000m. 현재 성벽은 잘 보존되어 있으며 문지(門址) 등의 시설이 남아 있다. 5개의 큰 골짜기를 끼고 있기 때문에 일명 오곡성(五谷城)이라고도 하며, 대고개산성(大高介山城)이라고도 불린다.
4세기말 고구려는 남진정책에 성공한 뒤 새로 개척한 남방의 영토를 확보하기 위하여 394년(광개토왕 4) 남방지역에 7성(城)을 쌓아 백제의 공격에 대비하였는데, 대현산성은 이 때 쌓은 7성 중의 하나로서 초축(初築)된 것으로 보이며, 통일신라시대 북방의 방어를 강화하기 위하여 762년(경덕왕 21) 이 지방에 쌓았다는 6성(五谷·鵂巖·獐塞·漢城·池城·十谷) 중의 오곡성으로 비정된다.
서흥지방은 예로부터 교통의 중심지로서 북으로는 평양으로 통하고, 동쪽으로는 신계를 거쳐 이천·평강 등 강원도로 통하며, 남쪽으로는 평산을 거쳐 개성으로 통하고, 서쪽으로는 재령·안악 혹은 신천 등을 통하여 서해에 다다를 수 있었다.
또, 자비산맥의 동쪽 끝에 있는 이 산성은 산맥의 서쪽 끝에 있는 정방산성(正方山城)과 함께 자비산맥 방어의 요충지였기 때문에 고구려시대부터 군사적으로 대단히 중요시되었으며, 고려시대 거란의 침입 때도 중요한 군사거점의 하나였다.
조선시대에도 인근의 수안군·곡산군·신계군을 방어하는 중심적 구실을 하였다.《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이 산성은 서흥·우봉·토산·황주·봉산·수안·곡산·신계 등 8개 고을이 각각 식량창고와 무기창고를 짓고 군량과 무기를 준비하는 책임을 맡고 있었다.
성의 시설로는 여장(女墻) 694군데, 치첩(雉堞 : 성의 외부로 돌출시켜 적을 효율적으로 사격할 수 있게 쌓은 것) 740군데, 옹성(甕城 : 성문의 앞을 가리어 빙 둘러싸 성문을 방어하는 작은 성) 3군데와 함께 동·남·북의 문루(門樓) 각 3칸과 장대(將臺) 2칸, 포루(砲樓) 2칸이 있었으며, 남문 안에는 따로 길이 45척, 너비 30척, 깊이 5척의 호지(濠池)도 있었다.
《서흥읍지 瑞興邑誌》에 따르면 지금 남아 있는 성벽은 1597년(선조 30) 감사 유영순(柳永珣)과 부사 조정견(趙廷堅)에 의하여 수축된 것인데, 이 때 자연사(紫烟寺)도 창건하였으며, 향리(鄕吏) 김훈(金勳)·김종(金鍾) 형제가 자력으로 창고도 지었다고 한다.
성안에서는 고구려시대의 기와조각이 발견되고 있으며, 산기슭에는 고구려시대의 적석총(積石塚)이 있다. 이 산성은 규모나 입지적인 점에서 우리나라 성곽의 대표적인 산성이라 할 수 있으며, 고려인의 대거란항쟁, 임꺽정의 난, 항일의병활동의 거점지로도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