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는 중국에 사신을 파견하는 것을 사대사행이라 하였다. 명나라에 가는 것을 조천(朝天), 청나라에 가는 것을 연행(燕行)이라 하였다. 이 사행에는 정례사행과 임시사행이 있다. 동지(冬至)·정조(正朝)·성절(聖節)·천추(千秋) 등은 전자에, 사은(謝恩)·주청(奏請)·진하(進賀)·진위(陳慰)·진향(進香) 등은 후자에 해당된다.
대체로 사신 일행이 중국에 가는 길은 한양을 출발하여 의주에 도착, 압록강을 건너면서 중국의 땅에 들어가는 육로가 있다. 또한 선천(宣川)선사포(宣沙浦)에서 바다로 등주(登州)를 거쳐 북경에 이르는 해로가 있다.
그런데 동팔참이란 이른바 중국과의 첫 접경지역인 주롄청(또는 鎭江城)에서부터 시작해, 탕참(湯站)-책문(柵門)-봉황성(鳳凰城)-진동보(鎭東堡, 또는 松站)-진이보(鎭夷堡, 혹은 通遠堡)-연산관(連山關)-첨수참(甛水站)-요동(遼東)-십리보(十里堡)-심양(瀋陽, 또는 盛京)에 이르는 육로에 있는 지역을 지칭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동팔참에 대한 사신들의 중국 사행기록에는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1712년(숙종 38)에 동지사 겸 사은사인 김창집(金昌集)의 군관으로 북경에 다녀온 김창업(金昌業)의 ≪연행일기≫에는 “의주에서 봉성까지 2참(二站)인데, 인가가 없어 노숙하며, 봉성에서 북경까지 31참인데 모두 찰원(察院)이 있고 봉성에서 요동까지를 일러 동팔참이라 한다.”고 하여 봉황성에서 요동까지를 동팔참이라 하였다.
1798년(정조 22)에 서장관으로 다녀온 서유문(徐有聞)의 ≪무오연행록 戊午燕行錄≫에서는 책문에서 심양까지를 동팔참이라 하였다.
또, 1832년(순조 32)에서 그 이듬 해 사이에 동지사 겸 사은사의 서장관으로 중국에 다녀온 김경선(金景善)의 ≪연원직지 燕轅直指≫에 의하면 “책문에서부터 영수사(迎水寺)까지를 동팔참이라 하는데, 하루 두 역참씩을 합해 팔참이 되어 이름지은 것이다.”라고 한 데서 동팔참의 유래와 지역을 파악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같은 책의 다른 기록에는 주롄청에서 십리하보(十里河堡 : 十里堡를 말함.)까지를 동팔참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동팔참은 대체로 주롄청에서부터 요동 또는 심양까지를 포함하는 지역의 역참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동팔참 지역은 조선 초기부터 조정의 지대한 관심사가 되었다. 그것은 이 지역이 대중국 사행로에 위치해 있으면서도 자주 야인(野人)의 습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사신 호송군 증가 문제로 여러 차례 논란이 일어났다. 또한 국방상의 요충지이기 때문에 의주성 등의 축성과 연대 설치를 주장하기도 하였고, 심지어는 우리 나라 백성이 동팔참 지역으로 역을 피해 도망가는 사태까지 발생하였다.
특히, 동팔참 지역은 조선 초기나 17세기 명·청 교체기에 있어서는 국방상 초미의 관심사로 대두되어 이 지역 방위에 대해 각별한 정책적인 배려를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통문관지 通文館志≫ 중원진공노정(中原進貢路程)에 따르면 압록강에서부터 산해관까지의 대중국사행로는 다음과 같다.
압록강-진강성-탕참-책문-봉황성-진동보(또는 松站·薛劉站)-진이보(鎭夷堡, 또는 通遠堡)-연산관(連山關, 또는 鴉鶻關)-첨수참-요동-십리보-성경-변성(邊城)-거류하(巨流河, 또는 周流河)-백기보(白旗堡)-이도정(二道井)-소흑산(小黑山)-광녕(廣寧)-여양역(閭陽驛)-석산참(石山站, 또는 十三山)-소릉하(小凌賀)-행산역(杏山驛)-연산역(連山驛)-영원위(寧遠衛)-조장역(曹莊驛)-동관역(東關驛)-사하역(沙河驛)-전둔위(前屯衛)-고령역(高嶺驛)-산해관(山海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