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여현(汝顯). 할아버지는 사옹원정 이사성(李師聖)이고, 아버지는 진용교위(進勇校尉) 이광(李廣)이다. 어머니는 대호군 유중창(柳重昌)의 딸이다.
1606년(선조 39)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1613년(광해군 5) 폐모론이 일어났을 때, 많은 선비들을 이끌고 상소하여 이위경(李偉卿) 등 3흉을 참(斬)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 때문에 미움을 받게 되자 집안식구들을 데리고 성내를 벗어나 태백산에 우거하였다.
인조반정 후에 경기전참봉이 되고, 1624년 정릉참봉(靖陵參奉)이 되었다. 1626년 사섬시봉사가 되고, 1628년에는 종부시지장에 올랐으며 이듬해는 사옹원주부가 되었다. 1630년 공조좌랑이 되고, 이듬해는 사복시판관을 역임한 뒤 1633년에는 진위현령(振威縣令)으로 나갔다. 1636년 용인현령으로 재직 시 도요지의 관리에 힘쓰도록 현지 주민에게 철저한 감독을 하였다.
1645년에는 3년 동안이나 안산군수를 지내면서 치적을 높였다. 1647년에는 인천도호부사에 올랐다. 1650년에는 사복시첨정이 되었으나 조그만 일로 파직되기도 하였다. 1628년 종부시직장으로 있을 때 2년전 병란을 당한 것을 거울삼아, 병란이 다시 오면 유실되기 쉬운 「선원보록(璿源寶錄)」을 잘 간수하기 위해 금강산과 태백산에 보관할 것을 주청하여 실행에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