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을 겪는 동안 훈련도감이 설치됨으로써 국민개병을 원칙으로 하던 부병제(府兵制)가 무너지고 모병제(募兵制)가 성립되었다.
이로써 종전까지 군역(軍役)을 지던 양민에게는 그 역을 면해주는 대신 대역세(代役稅)로서 군포(軍布) 2필씩을 바치게 했는데, 이를 양역(良役)이라고 하였다. 그 뒤 5군영(軍營)이 설립되면서 점차 수포(收布)의 대상이 확대되어 숙종 때 30만이던 것이 영조 때에는 50만에 이르게 되었다.
여기에 수령과 아전들의 협잡까지 겹쳐 어린이에게 역을 지우는 황구첨정(黃口簽丁), 죽은 사람에게서 수포하는 백골징포(白骨徵布)가 행해지고, 심지어는 친척과 이웃에게서 대신 거두는 족징(族徵) · 인징(隣徵)까지 행해지는 폐단이 발생하였다. 더구나 군포는 그 명색에 따라 3필 ·2필 등으로 고르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1703년(숙종 29) 이정청(釐正廳)을 설치하고 1704년 수군(水軍)의 군포 3필 중 1필을 감해줌으로써 종래 고르지 못하던 군포를 2필로 균일하게 하였다. 같은 해 12월에는 5군영의 군액(軍額)을 감하는 동시에 수군을 개혁하는 <수군변통절목 水軍變通節目>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근본적인 시정책이 되지 못하였다. 마침내 1750년(영조 26) 균역청을 설치하고, 이듬해에 <균역청사목 均役廳事目>을 반포해 일률적으로 군포 2필을 1필로 반감하였다.
그리고 그 대신에 재정의 부족액을 어(漁) · 염(鹽) · 선세(船稅) 등 해세(海稅)와 결전(結錢) · 은여결(隱餘結) · 선무군관포(選武軍官布) 등을 거두어 이에 충당하기로 하였다. 이로써, 양역의 폐단은 어느 정도 줄어들었다. 그러나 새로운 세를 징수하는데 따른 또 다른 새로운 폐단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순조 때에 안동김씨의 세도정치가 시작되자 삼정이 극도로 문란해지고, 관기의 문란에 따른 관리들의 협잡이 극심하였다. 그 결과 이에 대한 반발로 철종 때에 민란이 잇달아 일어나 거의 전국적인 규모로 확대되었다.
그리하여 1862년(철종 13) 안핵사(按覈使) 박규수(朴珪壽)의 건의에 따라 이정청을 설치하고 <삼정이정절목 三政釐整節目>을 반포하기에 이르렀다. 우선 전정(田政)에서는 백징(白徵)과 같은 폐단과 제반 부가세를 폐지하는 등 13종의 시정책이 마련되었다.
군정(軍政)에서는 황구첨정 · 백골징포와 투속(投屬 : 역을 피해 도망한 자가 자수한 뒤 본역에 복귀함.) 등 5종의 시정책이 마련되었다. 그리고 폐단이 가장 심한 환정(還政)을 근본적으로 개혁해 환곡(還穀)을 폐지하였다.
그 대신 전결에 대해 부가세로 두 냥씩의 결전을 징수하기로 하고 모두 23종에 달하는 시정책이 마련되었다. 그러나 이 <삼정이정절목>은 반포한 지 두 달도 못되어 그 시행을 중지함으로써 삼정은 민란 전의 상태로 환원되기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