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구 견지동에서 창립된 동학계 종교이다. 이용구는 일찍부터 동학에 가입, 손병희(孫秉熙)와 함께 최시형(崔時亨)의 제자가 되어 천도교 발전에 이바지했으나 일진회(一進會)를 조직, 친일적 노선을 걷게 되자 천도교로부터 출교를 당했다.
천도교에서 나온 뒤 그를 따르는 박형채(朴衡采)·권병덕(權秉悳)·송병준(宋炳畯) 등과 신도들을 모아 1906년 서울 견지동에서 시천교를 세웠다.
그리고 천도교의 대도주(大道主)로 있던 김연국(金演局)을 시천교의 대례사(大禮師)로 삼았다. 시천교라는 명칭은 천도교의 주문 중 ‘시천주조화정 영세불망만사지(侍天主造化定 永世不忘萬事知)’에서 따온 것이다.
1912년이용구가 사망하자, 1913년에는 김연국이 시천교에서 출교당한 권병덕과 더불어 서울 가회동에 교당을 세우고 제화교(濟化敎)라고 하였다가 다시 시천교로 고쳐 부르면서, 시천교는 견지동시천교와 가회동시천교로 나누어졌다.
가회동시천교의 교주 김연국은 1920년 충청남도 계룡산 신도안으로 교당본부를 옮기고 교명을 상제교(上帝敎:뒤의 天眞敎)라 개칭하였으며, 견지동의 시천교는 송병준을 교주로 하였으나 교세가 약화되어 갔다.
시천교의 조직기구는 중앙공회(中央公會)를 두고 주임종무원→종무장→과장→종리장(宗理長)→대도사→도사→선도사의 순으로 구성되어 있다.
중앙종무부에는 대도사·종리장·서무과장·포덕과장·경리과장·감찰과장 각 1명씩 두며 약간 명의 사서(司書)를 두었다. 교인은 주문을 외우고 심고(心告)를 드리며 성미(誠米)를 의무적으로 바쳐야 했다.
천도교와 대립하여 창립된 시천교는 초창기에는 교세가 급신장하여 천도교를 능가했으나 일진회가 해산되고 이용구가 사망하자 김연국과 송병준이 분열하였다.
김연국은 시천교 총부를 만들었고, 교주 송병준을 추종하는 세력은 약화일로를 걷다가 1927년에 이르러 평안남도 개천에 시천교 별파를 창립하고 제우교·청림교(靑林敎) 등 동학 계통의 각 파와 합동을 계획했으나 부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