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태사(開泰寺)는 원래 고려 태조 왕건(王建)이 후백제의 견훤(甄萱)을 쳐서 승리한 뒤 승전기념으로 건립하였던 것으로 임진왜란 때 화재로 소실되었는데, 김광영이 43세 때 꿈에 관음보살의 계시를 받고 개태사 터에 묻혀 있는 석불(石佛) 세 개를 찾아냈다.
그 뒤 석불을 본래 위치에 복구하고 사찰을 중건한 뒤 그녀 자신이 주지가 되었다. 병자들에게 안수(按手)로 치병해 주고 도인(道人)으로 신봉을 받다가 광복 후 추종하는 사람들을 모아 용화회(龍華會)를 조직, 유·불·선 삼교합일의 대법(大法)으로 후천 용화세계를 맞이한다는 기치 아래 본전(本殿)에 ‘삼천일지개태도광사(三天一地開泰道光寺)’라는 간판을 붙였다.
이 명칭은 개태사가 위치한 곳이 천호봉(天護峰) 아래에 있는 천호성(天護星)이라 하여 ‘삼천일지’라 하였고, 개태사의 도광(道光)이 세계만방에 미친다는 뜻에서 붙여진 것이다.
1946년에는 미륵불을 모시는 용화전을 짓고 삼일지상정천궁(三一地上正天宮)이라 불렀으며, 1947년에는 단군상을 봉안하는 창운각(創運閣)을 짓고 관운장을 모시는 충의전(忠義殿)도 만들었다. 사찰 내에 단군전을 세운 것은 단군이 한민족의 시조일 뿐 아니라 전우주를 주재하는 천존(天尊)님이라고 믿은 데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므로 아미타불도 천존님이고 용화불도 천존님이기 때문에 단군천존님과 더불어 한국에 통일의 운수가 열리게 되므로 창건의 주재자는 단군이라는 뜻에서 단군전각도 창운각이라 명명한 것으로 보인다.
이 창운각에 모신 단군영정은 일제 때 순종의 비인 윤비 집안에 비장되었던 것을 김영광 여인이 직접 인수한 것이라고 하나 확실한 근거는 없다. 이러한 점에서 개태도광사의 중심 신앙은 미륵신앙이라기보다는 단군신앙이라고 보아야 할 것으로 보이며, 따라서 당연히 창운각에 바치는 치성이 중심이라 할 수 있다.
일정한 경전은 없고 불전치성과 마찬가지로 아침 저녁으로 분향을 올리는 의식을 행하였다. 음력 3월 16일의 어천절(御天節), 음력 4월 8일의 불탄절(佛誕節), 음력 10월 3일의 개천절(開天節)을 기념일로 삼았으며, 의식 진행은 불교식에 준하여 행하였다. 주지 김광영 여인의 사망 후 한때 대한불교법상종에 속했으나, 현재는 대한불교조계종 소속 사찰이다.
다만 개태사 내부에 단군치성을 드리는 창운각이라는 전각이 남아 있다는 정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