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자강회는 1905년 5월 이준(李儁)·양한묵(梁漢默) 등이 조직한 헌정연구회(憲政硏究會)를 확대, 개편한 것이다. 장지연(張志淵)·윤효정(尹孝定)·심의성(沈宜性)·임진수(林珍洙)·김상범(金相範) 등 20여 명이 국민 교육을 고양하고 식산(殖産)을 증진해 부국강병을 이루어 장차 독립의 기초를 마련하기 위한 목적으로 조직하였다. 1906년 4월에 조직되어 강연회의 개최, 기관지 발행 등을 추진하였다.
회칙에 의하면, 회원과 본회의 목적에 찬성하는 찬성원으로 구성되었다. 임원은 회장 1명, 부회장 1명, 평의원 20명 및 회의 사무를 집행하는 간사원 20명, 그 밖에 법률과 정치에 정통한 일본인 1명을 고문으로 둔다고 규정하였다.
1906년 4월 임시회에서 임원이 선출되었다. 회장에 윤치호(尹致昊), 고문에 오가키(大垣丈夫), 평의원과 간사원은 각각 10명씩 선임되었다. 부회장이 선출되지 않고 평의원과 간사원이 규정보다 적었던 것은 창립 초기여서 회원 확보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때문이다. 계속적인 임원 개편이 있다가 결국 9월의 임원보선시에서 규칙에 규정한 임원진을 구성할 수 있었다. 임원의 임기는 6개월로 연임이 가능하였다. 회원은 임원 2명 이상의 보증과 추천을 받아 입회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러한 조직을 바탕으로 각 지방에 지회를 설치해 활동의 범위를 넓혀갔다. 지회 설립의 방법은 지방 유지가 본회의 취지·목적에 동의하고 그 지방에서 동지 30명 이상을 확보해 입회 청원을 하면, 본회에서 평의원 이상 임원 중 2명 이내의 인원을 선정해 해당 지역의 사정을 시찰하도록 하였다.
시찰원이 결과를 평의회에 보고한 뒤 그 지방에 대한 보증을 서야만 평의회에서 통과되고 월보와 회원증을 발송하였다. 그리고 전체 회원의 모임인 통상회(通常會)의 승인을 얻어야 비로소 지회로서 인정받고 활동할 수 있었다.
이처럼 절차가 복잡한데다가 활동기간이 1년 정도에 불과했던 관계로 지회 조직은 적은 편이었다. 1907년 5월의 보고에 의하면 전국에 25개소가 있었다. 때문에 활동은 주로 서울의 본회가 중심이 되었다. 회의 목적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본회에 교육부와 식산부를 두어 사무의 확장을 담당, 연구하게 하였다.
이러한 연구를 바탕으로 매월 1회씩 열리는 통상회마다 회원 이외에도 일반 대중이 참석할 수 있는 연설회를 개최하였다. 또 이를 일반에게 알리기 위해 『대한자강회월보』를 발간하였다. 그리고 회에서 긴급히 실시되어야 한다고 결정된 사항은 정부에 회원을 파견해 건의, 관철시키려 하였다. 정부에 건의한 사항은 교육활동 측면으로는 학부교과서 편집문제·의무교육 실시·사범학교 설립·각 사립학교 연락건 등이 있다. 이 밖에 사회교육의 일환인 조혼 금지 등을 들 수 있다.
당시 전국에서 유흥비 마련을 위해 가족 몰래 가산을 파는 행위가 만연했는데, 이를 바로잡고 개인의 재산 보호, 나아가 식산흥업을 위해서도 부동산 매매시 증명서를 첨부해야 한다는 법령 반포를 건의하기도 하였다. 그 밖에 식산흥업의 필요성, 국가부원 증진책(國家富源增進策), 식산 결여의 원인, 황무지 개척, 일제의 황무지 개척 요구의 저의, 한국의 기후, 한국의 생산물, 임업의 필요, 토지 개량의 필요성, 종자 개량 등에 대한 구체적 연구를 거친 후 월보를 통해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국채보상운동 때 적극적인 참여를 결의하기도 하였다.
운영에 필요한 재정은 회칙에 따라 회원의 입회금과 독지가의 기부금으로 충당하였다. 회비는 가입시 입회금 1원을 내게 되어 있었으나 실제의 운영은 주로 기부금과 찬조금에 의존하고 있어 재정 상태는 궁핍한 실정이었다.
이 회는 출발 당시부터 법이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 활동 범위를 설정했기 때문에 소극적이며 온건한 계몽운동으로 일관하였다. 또한 당시 정부도 통감부의 영향 아래 있었기 때문에 대정부건의운동도 실질적인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 특히,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일본인 고문 오가키를 두었지만, 그가 한국인을 위해 활동하기를 기대한다는 것은 어려웠다. 이것은 그의 회고담에서 그가 일제 침략의 수족으로 활약했음을 밝히고 있는 데서도 잘 나타난다.
이 단체는 국채보상운동 이후에는 적극적인 현실참여운동을 전개하면서 일제의 탄압을 받게 되었다. 결국 1907년 8월이완용(李完用) 내각의 지시에 따라 내부대신의 명의로 해산당하고 말았다.
대한자강회는 많은 한계를 안고 있었지만, 당시의 사회적 제약 아래서도 월보의 간행, 지회의 설립 등으로 주권회복·자주독립의 쟁취를 위한 국민계몽에 이바지한 바 크다. 그리고 그 뒤에 조직되는 대한협회의 전신이라는 점에서 한말 애국계몽운동의 전개에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